회복은 거창하지 않았다.

- 나를 살리는 작은 습관들

by 흰물빛

회복은 의외로 터무니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




대체로 직장인들은 가슴속에 사직서를 품고 살지 않나.


하지만 이직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꼭 사람인, 인트라넷, 잡코리아 다 들락날락해 본다.


이력서 적고, 자소서 적다가 보면 솔직히.


'아, 이 짓을 또 해야 된다고?'

'몇 년 전이라 기억도 안 나네.'

'귀찮음!!'


장점, 단점 쓰라길래 내 장점 단점 키워드로 정리하려다가 단점만 백 개라서 장점이 뭐더라?


입사할 때 썼던 자소서(라고 쓰고 자소설이라고 읽는다)를 클릭해서 열어본다.




그랬구나.

내 장점이 이거였지.


그나마 쓸만한 거 면접관 앞에서 포장해야 되니까 그럴듯한 장점 내밀어서 썼다.


포장을 과하게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일단 내 장점은 맞지.


그랬다.


나는 똑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나다.


취업하겠다고 눈 반짝이며 자소서를 쓴 나도.

퇴사하겠다고 동태 눈알으로 이전 자소서 열어보는 나도.


본질은 나다.



면접관 앞에서 이거 잘해요, 저거 잘해요, 잘할 수 있어요 똥꼬쇼 펼쳤었다.


왜 그렇게나 들어오고 싶어서 열의 가졌던 공간에서 나는 무기력해졌을까.


나는 목표가 있으면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가졌던 열의, 내가 해내고 싶었던 것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학벌이 남들보다 낮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막혀가면서,

나는 그냥 목표를 잃어갔던 거다.


내가 변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엽떡 하나 시키면 단순하게 행복한 사람인데.

뭐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해 봤다.




나는 그냥 짜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취업을 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던 거다.



그냥 대한민국 나이 시간에 맞춰서 해야 되는 것들을 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때에 맞춰 졸업을 하고,

때에 맞춰 취업을 하고,

때에 맞춰 결혼을 해야만 그것에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되니까.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간단했다.


내가 살고 싶었던 인생은 뭐였을까?


갑자기 어려워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소서를 껐다.


내 소중한 맥북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카페로 갔다.


누구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공간.


이 공간에서 회복이 시작됐다.


갑자기 내 눈은 그 때 취업을 갈망하던 그 빛나는 눈동자가 됐다.




그래, 나는 외국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구나.


대학 졸업한 내가 돈이 없어서 아예 배제했던 그걸 지금은 할 수 있겠구나.




잠깐, 지금 갑자기 공부하러 가기에는 내 나이가 많지 않나?


30에 갑자기 공부하러 간다고? 이직이 맞지 않나?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두 놈이 싸운다.




길게 생각하자, 길게.


일단 80까지는 거뜬하게 살 것 같단 말이지.


뭐라는 거야. 100 세 시대라고.


'엥? 나 이제 고작 인생에 30% 살았다고?'


갑자기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평균 여자, 25세에 졸업하고 정년 퇴직 60 세라고 보자.

45년 회사에서 썩는다.


앞으로 25년 회사를 더 다녀야 되는데, 계속 영어도 못해서 배제당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삶을 1~2년 투자해서 23년?



갑자기 1~2년이 매우 짧아 보인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참 쉽다.


그런데 그 1~2년이 뭐가 그렇게 아까웠을까.



갑자기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회복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내가 좋아하는 조용한 카페에서,

그렇게 터무니없이 시작됐다.


내가 뭐를 할 수 있을까?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