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토끼씨에 대한 단편적인 일기들

by 까마귀 소년

이번 편은 그냥 제가 쓴 25년도 일기들 중 토끼씨 관련 내용을 이어서 붙였습니다.

——————————————-

며칠 지나고 이어서- 요새 부쩍 토끼씨에 대한 생각을 꽤 한다. 사실 성격도, 나이도 몰라서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힘들긴 한데, 몇 안 되는 장면들을 생각하거나, 아님 미래가 있을지에 대해서 요모조묘 따져본다. 미래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귀여운 외모가 나이에 비해 동안인 건지 아님 진짜 어려서 나랑 나이차이 많이 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성격이 나랑 잘 맞을지 미지수인 것을 생각해 보면 현실성은 매우 낮고, 그냥 이 정도 거리에서 매일매일 설렘 받는 관계로 유지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분이 나를 호감일지 아닐지도 모르는 점이니 혼자 생각해 봐도 무의미 하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 관계가 진전된다면 뭔가 같이 경주 가서 한복 입고 산책하는 건 해보고 싶다. 왠지 그분이 한복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렇다.


———————————————

11월 12일 일기


오늘은 다시 토끼씨의 귀여움에 갇힌 하루였다. 1시쯤 지나서 빵집에 갔는데, 내가 빵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으니 뭔가 정리하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왔다 (여기서부터 귀여웠음). 그러더니 샌드위치중 하나 말하면서 이거 드셔보셨어요? 하더니 웃으면서 닭가슴살이 뻑뻑하단 편견을 없애주는 샌드위치에요!! 하는데 심장이 아팠다… 그리고 계산할 때 스콘도 따로 챙겨주심 ㅎㅎ. 요새 바쁠 때 가서 그런지 상호작용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오늘은 또 몇일치 설렘과 따뜻함 채워줬다. 근데 진짜 무슨 사이입니까 우리. 그냥 친한 단골 정도 입니까 아님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까… 하루에 2분씩 가까워지는 슬로우 관계.. 이러다 포항 떠나겠다…

———————————————-


12월 8일


우울한 하루 그 자체였다. 꿈에는 계속 전여친이나와서 아침부터 무기력하게 시작한다, 대체로 전여친이 나한테 돌아오는 꿈이고 대체로 그 꿈속에서 내 기분은 괜찮았던 것 같다. 이런 상태에서 눈을 뜨면 또다시 혼자라는 것이 체감돼서 무기력해진다. 일도 그다지 진전이 안되며,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픈 상태로 보냈다.


그러다 5시에 미용실을 예약해서 버스 타고 시외버스 쪽으로 가고 있었다. 내리려고 버스 문쪽으로 가서 서있을 때 어떤 여성분이 나를 쳐다보셨고 인지되고 보니 토끼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걸어주었다. “앉아 계신 거 봤는데 맞는지 확신이 안되었어요ㅎㅎ” 대충 이런 말을 하면서 인사했고 어디 가는지에 대해서 서로 말을 한 후 헤어졌다. 맨날 유니폼 입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평상복에 모자까지 쓰고 있는 모습 보니깐 색다르게 느껴졌고, 항상 존댓말로 안녕히 계세요/가세요 인사했는데, 마지막에 서로 손 흔들면서 헤어졌는데 이것도 좀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이 사건 때문에 앞서 우울감이 싹 사라져 버리고 설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방금 일화랑 무슨 상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나는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에 대한 부분적 답을 찾았다. 나에 부족함과 우울감을 채워줄 사람인 것 같다. 내가 물리나 일을 하다가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나와 달리 생활력 강한 사람인 것 같다. 토끼씨 보면서 설레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생활력 강해 보이고, 귀엽고 힐링돼서 사귀면 내 하루의 우울감들을 다 없애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앞선 연애의 레슨으로 너무 의존하거나 여자친구를 위한 삶을 살진 않을 것이다.


토끼씨 너무 귀엽다… 내려서 좀 더 길게 이야기 안 한 것을 후회 중이다. 친구 하자 하고 번호도 물어볼걸…. 하… 언제 가까워지냐.




————————————————

12월 15일 일기


오늘 토끼씨가 내 세계로 들어왔다. 오늘은 용기 내서 번호 물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저번주 마주쳤던 같은 시간에 버스를 탔다. 근데 아쉽게도 10초 차이로 토끼씨가 해당 버스를 놓쳤다. 그냥 다음 기회를 기약할까 하다가, 그다음 정류장에서 내려서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가 탔다…


내릴 때까지 토끼씨가 말 안 걸어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는데, 다행히 내리기 직전에 나를 툭툭 치면서 아는 척을 먼저 해주었다. 그래서 내려서 대화를 좀 했다. 여기에도 에피소드가 좀 있는데, 버스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미리 짜갔다:


오늘도 운동하세요? (저번주에 운동 간다 했었음)-> 퇴근하면 주로 뭐 하세요? -> 나한테 되물어 보면 난 친구가 없어서 주로 혼자 논다, 하고, 포항 분이시면 포항에 친구 많겠네요?-> 오 혹시 저랑 친구 하실래요? 이런 Flow 를 생각해 갔는데, 변수가 발생했다.

버스에서 같이 이야기하면서 가는 그림을 그렸는데, 안타깝게도 버스에서는 대화를 못했고, 내려서 대화를 하게 된 것이다. 내려서 인사 좀 하고 어디 가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헤어지는 정도의 시간만 할당된 짧은 시간에 저런 플로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히 인사랑 짧은 대화를 하고 헤어졌다.


그냥 이렇게 또 오늘의 기회를 소진하는 건가 하다가, 짧은 대화 속에 토끼씨가 오늘은 왜 빵 드시러 안 오셨어요?라고 물어봤었는데 이게 나한테 용기를 줬다 (의미 없이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해서) 다시 토끼씨가 앉아있는 정류장으로 돌아갔다.


토끼씨: 왜 다시 오셨어요?

나: 토끼님 혹시 저랑 친구 하실래요?

토끼씨: 저는 좋죠~

나: 제가 포항에 친구가 없어서

토끼씨: 아.. 그럼 제가 포항 첫 친구네요!

나: 번호 알려주실 수 있나요?

토끼씨: 네네 나중에 밥 같이 먹어요!

나: 감사합니다.


아니 미리짜간 것이 이상하게 반영되어서 안 해도 되는 “친구가 없어서…” 이런 구질구질한 말을 했다… 친구 없어서 불쌍해 보여서 친구 해준 건가 싶기도 하고.. ㅠㅠ


암튼 짧은 순간이었는데, 토끼씨가 내 세상으로 걸어 들어왔고, 정말 오랜만에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토끼씨가 먼저 선톡해 주셨다, “나중에 밥도 먹고 카페도 가요! ㅎㅎ”



나는 새로운 연애를 통해 뭐를 추구하고 얻고 싶은가?


일단 내가 새롭게 구축한 내 삶은 유지하고 싶다-연구실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며, 디코방 사람들이랑 자주 같이 놀고, 독서토론도 주기적으로 참여하고 등등. 또 블로그나 브런치에 내 글도 주기적으로 올리고 싶다.


그러면 내가 충족하고 싶은 지적인, 취미적인 면들이 다 충족이 된다. 그러면 남는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류 정도 아닐까? + 어디에 소속된다는 안정감 정도- 세상에 혼자 있다는 느낌이 안 들게. 이 정도만 기대하고 관계를 맺어보자! 나의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초인적인 한 명의 존재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런 기준들을 떠나, 토끼씨를 보면 설렌다, 이 감정은 자주 안 느껴지는 특별한 것이니 의미 있다 생각하고,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말고, 관계를 맺어보자.


25년도가 끝나 간다! 길고 길었다. 이제 더 이상 전여자 친구 생각도 많이 안 난다. 꿈에도 안 나오기 시작했고!

26년도엔 새로운 인연들과 새로운 삶을 재밌게 살아보고, 우울감, 공허함도 삶의 리듬 중 일부라고 받아드려 보기!!

토요일 연재
이전 07화[7화] 회복의 빵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