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아빠 이야기예요"
학원을 운영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시간보다, 제가 아이들에게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 더 많다는 걸 느낍니다. 오늘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중학생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늘 웃는 얼굴로 등원하는 '전교 1등' 친구가 있습니다. 저와 만난 지 4개월 된 중학생인데, 영어 기본기가 탄탄한 건 물론이고 영어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기특한 녀석이죠.
그런데 며칠 전, 수업이 끝나고 이 친구가 쭈뼛대며 칠판에 무언가를 적더군요.
“넷플릭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꼭 보세요! “
"선생님, 이거 진짜 꼭 보셔야 돼요. 강추예요! “
평소 학업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안 하던 친구라 의외였습니다. 왜 그렇게 추천하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그 회사 배경이 KT거든요? 근데 우리 아빠 회사랑 똑같고요. 심지어 주인공이랑 아빠랑 부서도 같고 직급도 같아요. 완전 우리 아빠 이야기예요! “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습니다. 자신이 아는 세계가 화면에 나온다는 신기함 때문이었겠죠. 저는 가볍게 "그래? 선생님이 주말에 꼭 챙겨 볼게"라고 약속했습니다.
주말 동안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드라마를 켰습니다. 사실 큰 기대 없이 시작했는데,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치열한 경쟁, 언제 밀려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혀야 하는 중년 가장의 현실...
화면 속 '김 부장'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저는 제 앞에서 해맑게 웃던 그 학생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님도 매일 이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학원비를 보내주시는 거였구나.‘
여의도 정치판에 있을 때는 '노동 시장 유연화'니 '정년 연장'이니 하는 건조한 정책 용어로만 접했던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학원 원장이 되어 학부모님의 삶으로 접하니, 그 무게가 전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월요일 수업 시간, 다시 만난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도 그거 봤어. 드라마 보면서 어떤 걸 느꼈어?"
내심 "주인공이 웃겨요"라거나 "회사가 좋아 보여요" 같은 중학생다운 대답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아빠가 돈을 참 힘들게 버신다는 걸 느꼈어요... 그리고 우리 아빠가 꼭 상무로 진급했으면 좋겠어요."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철없어 보이는 아이의 눈에도 아빠의 고단한 어깨가 보였던 겁니다. 16살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은 '아빠의 승진'을 빌어주는 것이었겠죠. 아직 어리지만 이 친구 눈에도 아빠가 견디고 있는 가장의 무게를 체감한 것 같았습니다.
그날 저는 수업을 하면서 아이의 얼굴을 자꾸만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전교 1등이라는 성적표 뒤에는, 묵묵히 그 뒷바라지를 감당하는 아버지의 땀방울이 있었고, 그걸 알아주고 응원하는 아들의 기특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치인 시절, 저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오늘도 출근길에 오르는 수많은 '김 부장'님들의 인내심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다음 주에 아빠가 휴가라서 학원 픽업을 오신다네요. 아직 일주일이나 넘게 남았는데 아이는 벌써부터 ”선생님 저 월요일엔 일찍 끝내주셔야 해요!! 아빠랑 KFC 가기로 했어요 “ 라며 들떠있네요. 아빠가 진급했으면 좋겠다는 아이의 간절한 소원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아빠의 어깨가 조금은 덜 무거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노력한 만큼 정당하게 대우받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기를 꿈꿔봅니다.
저는 비록 지금 법을 만드는 곳에 있진 않지만, 이 기특한 아이가 자신의 꿈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영어 단어 하나, 문법 하나라도 더 정성껏 가르치는 것으로 제 몫의 응원을 보내려 합니다.
"선생님이 보기엔 너희 아버님은 이미 최고의 '상무님'이셔. 이렇게 멋진 아들을 키워내셨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