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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그러나 쿨하게 #2

여행의 방법

by 숨 쉬는 돌

우리의 여행 과정은 이렇다.

책을 읽거나, 다른 어떤 요인으로 인해 한 장소가 꽂히게 된다. 물론 주로 내가. 그리고는 남편과 상의를 한다. 물론 주로 통보이다. "여기여기를 가 보고 싶어 졌어. 갈래?" 늘 대답은 정해져 있다. "가자"


뭐에 홀린 듯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나의 여행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오랜 시간을 들여 지도를 찾아보고 동선을 짜서 최선의 위치에 숙소를 예약한다. 엑셀 파일 몇 장을 빼곡히 채우도록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그 나라에 혼자 여행을 다녀오는 셈이다.


그리고 대망의 출발 시간. 나는 시간별로 정리된 완벽한 계획표를 남편에게 넘기고는 정신을 놓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남편의 여행이다. 길을 찾는 것도, 메뉴를 정하는 것도, 어디를 둘러볼 지도 모두 남편이 결정한다. 99%의 정확도에 가까운 나의 계획표는 남편의 손에서 너덜너덜해지고,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지워지고 없다. 그럴 거면 계획은 왜 세우냐고? 막상 여행을 갔는데 아무 정보가 없어서 심심하면 안 되니까!


일단 떠나왔다는 것,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새로운 냄새가 맡아진다는 것 자체가 나를 미치도록 설레게 한다. 그걸로 나는 된 것이다. 이제부터 펼쳐질 어떠한 경험이라도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이 이상 무엇을 더 해야 만족할 것인가? 우연히 발견한 맛집, 친절한 사람들, 길을 헤매는 시간, 소매치기, 예기치 않은 사건 사고들. 모든 것은 몸에 녹아들어 나의 여행 DNA가 될 것이다.


그에 반해 남편은 평소에 여행 준비를 할 시간과 의지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래도 짬짬이 숙소 예약이나 동선을 함께 의논하며 슬슬 시동을 건다. 그러다가 나에게서 대망의(!) 엑셀 파일을 받아 드는 순간 알게 된다. '아, 이 여자가 이제 정신줄을 놓을 거구나. 나라도 정신 차리지 않으면 큰일이구나.' 첫날 도착해 공항에서 유심을 사는 것부터 렌트며 운전,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기 등등 수많은 일을 해내는 슈퍼맨이 된다. 나는? 그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늘 빈둥거리는 한량이 되고.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남편은 내가 정한 숙소나 식당, 루트 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맞춰 갈 뿐이다. 나 역시 남편이 길을 잃는다거나 좀 바보 같은 선택을 하더라도(남편들은 왜 그런 걸까 궁금할 때가 많지만) 탓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여행이니까. 아무리 완벽한 계획과 파트너가 있더라도 완벽할 순 없는 것이 여행이니까.


결혼 후 몇 번의 여행을 거치며 가족 구성원이 바뀐 것처럼 여행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좋은 여행 파트너다.


나의 작은 소망 중 하나는 남편의 은퇴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는 것이다. 나의 계획을 밝혔더니 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왜 꼭 나랑? 친구랑 가도 좋지 않겠어?" 나는 씩 웃으며 대답한다. "아니, 여보랑 갈 거야. 이보다 더 완벽한 보디가드이며 짐꾼이며 내비게이션이 어디 있겠어? 거기에다 내 지랄 맞은 성격을 다 받아주며 그 긴 길을 걸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지."

그날이 빨리 오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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