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배낭여행의 맛을 본 뒤로 나는 줄곧, 떠나고 싶었다. 통장에 잔고가 조금만 늘어나면 어디론가 갈 궁리를 했다. 시급 이천 원의 서빙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직원이 몇 안 되는 작은 출판사에서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나는 바람 냄새를 쫓았다.
흔히 여행은 하고 싶은데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고들 한다. 나에게 여행의 걸림돌은 언제나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돈은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이 길어지면 숙소의 값은 점점 내려갔고, 식사는 당연히 간소해졌다. 막상 간 곳에서 예산이 부족해 멋진 투어 같은 건 포기해야 할 때도 많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돈이 없어서 저것도 못하다니, 애석하기보다는 그래도 이 길을 걷고 있음에 행복했다.
내 여행의 목적이 관광이거나 인증샷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 나라에서 누구나 알 만한 숙소에 묵으며 맛집을 탐방하고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며 SNS에 올리려면 예산이 중요해진다. 돈이 없으면 떠날 수 없다.
나는 애초에 그렇게 사회적인 사람은 아니었는지, 아주 잠깐 해봤던 SNS에서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들의 멋진 인생이 있었다. 다들 맛있는 걸 먹고 예쁜 사진을 찍었으며, 좋은 곳에 있었다. 부러웠다. 나는 그런 사진들을 지하철에서 끼인채로 보았다. 야근하는 날 쫄쫄 굶어가며 보았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날, 시리도록 푸른 이국의 하늘과 바다를 보면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때로는 나의 찰나가 그들에게 위화감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슬픈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는 SNS를 접었다.
나는 소박할 수도 있고, 구질구질할 수도 있는 나의 여행을 한다. 내가 더 많은 돈이 있다면 이러지 않을까를 생각해보다가 문득 놀란다. 돈이 좀 더 있다면 더 긴 여행을 떠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처럼 멋지고 화려한 여행과는 맞지 않는 싸구려 여행자인가 보다. 역마살의 노예인지도.
결혼을 하고 순진한(?) 남편을 꼬셔 내 여행 방식을 주입시킨 후 나는 더욱 신이 났다. 혼자서 다닐 때보다 외롭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든든했다. 한눈에 보아도 보안이 취약할 것만 같은 숙소에 묵어도 남편과 함께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언제든 함께 떠나 줄 거라는 믿음만으로 들썩이는 나의 마음을 잡아주는 사람.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다독여 좋은 마무리를 해주는 사람. 무엇보다 기복 심한 내 성격을 묵묵히 받아주는 가장 큰 장점까지 지녔으니 가히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가끔은 의견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는 나의 기준보다는 조금 나은 숙소에 묵고 싶어 했다. "우리가 언제 여기를 다시 와 보겠니, 온 김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보자." 했다. 힘든 날은 택시도 타자고 했다. 공항에서 예쁜 시계도 사주겠다고 했다. 틀린 방식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모든 게 어색했다. '여행자'의 나는 여행을 시작할 때 면세점에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를 사는 순간 그것은 몇 날 며칠을 끌고 다녀야 하는 짐이 된다. 숙소가 너무 좋으면 폭신한 침구에서 뒹굴고 싶을 뿐 밖이 궁금하지 않다. 숙소가 허름할수록 밖으로 나가 걷고 싶어 진다. 터키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카파도키아에서 남편은 일인당 몇십만 원 하는 열기구를 타보자고 했다. 언제 여기 또 오겠냐며. 나는 여기까지 온 걸로 됐다 했다.
몇 번의 논쟁과 실랑이 끝에 적절한 대안을 찾았냐면, 다 필요 없게 되었다. 아이가 생기고 난 후에는 모든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조금 더 안전하고 편안한 곳을 찾게 되었다. 여행을 간다고 해서 육아를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남편 말대로 '여기까지 와서' 굳이 더 고단한 계획을 세우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게으른 여행자'가 되어 갔다.
(어린 아기를 데리고 용감한 여행을 하는 멋진 엄마들 이야기를 많이 읽었지만 미치도록 부럽기만 할 뿐 엄두는 나지 않았다.정말 그 분들은 존경스럽다.)
그 전에는 생각도 안 해봤던 렌트를 하였으며, 몇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수영장은 숙소를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이 되었다. 리조트 안에서 웬만하면 모든 걸 해결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이들 뿐 아니라 기저귀 가방과 여벌 옷, 간식이 줄줄이 세트로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런 편하고 안전한 여행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나에겐 언제나 리조트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보이는 현지인들의 시장과 골목을 걷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길거리 음식을 아무렇게나 앉아서 먹고, 흥정에 실패한 과일을 한 아름 사고 싶었다. 나의 마음을 아는 남편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며 웃어주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7살, 4살이 되던 해 베트남 여행에서 드디어 리조트를 졸업했다. 작은 수영장이 있는 숙소의 패밀리룸을 예약했다. 수영장이 너무 작아서인지 이용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우리 가족이 전세를 냈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은 그곳에서 워터파크 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뒹굴었다. 한바탕 수영을 하고 늦은 오후가 되면 아이들 손을 잡고 산책 겸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시장에서 산 꼬치와 길거리 트럭에서 파는 주스를 아이들은 잘 먹었다.
어딜가든 아이들과 함께면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졌다. 신기하게 생긴 과일을 구경하고 있으면 덤으로 끼워주기도 했고, 바가지를 씌울지언정 웃음을 얹어주었다. 집앞에서 아기를 업고 있는 그곳의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동병상련의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른의 딱딱한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신비한 존재라는걸 알게 되었다.
골목길에서 옥수수 구이를 사 먹고, 드러누운 고양이를 한참 구경했다. 작은 슈퍼에서 동전을 바꿔 '뽑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사 와 아이들을 재운 후 홀짝거렸다. 리조트 여행보다 몸은 훨씬 고단했지만 행복했다. 내 여행의 세계로 아이들을 한 걸음 데리고 들어 온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지금보다 더 소박한 여행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중국의 딱딱한 90도 의자 기차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삼등칸도 함께 타고 싶다. 태국의 봉지 주스도 사 먹고, 유럽의 돌 길도 지치도록 함께 걷고 싶다. 오래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많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발딛은 그곳의 문화에 예의를 갖추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돌아오는 여행을 하고 싶다.
우리, 계속 소박한 여행을 다니자꾸나. 지구의 많은 곳을 두 발로 걸으며 느껴보자. 엄마 아빠가 너무 늙기 전에.
여행을 하는데 맞고 틀린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의 여행을 하든 나의 몸과 마음이 달라져서 온다면.
누군가에게는 치유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도전이 될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