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기내에서 나 혼자 격렬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거짓말처럼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부터는 내가 도착할 나라 체코의 20년 전 모습이 그려지며 여행에 대한 설렘도 되살아났다.
공항에서 나와 도심 버스를 타려는데 나는 캐리어가 하나구나 하며 새삼 놀란다. 아이 손을 잡고 두어 개의 캐리어를 밀고 당기던 손이 허전하다. 비어있는 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이가 울거나 칭얼거리면 그 상황 자체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더 눈치가 보였다. 군중 속에서도 오늘 나는 그냥 다 큰 어른일 뿐이라 누구도 관심이 없다. 그 무관심이 편안하다.
하루 먼저 도착해 있던 남편과 만나기로 한 숙소에 도착해서 방을 둘러본다. 혼자 출장을 올 때마다 그는 이런 기분이었구나 생각하다 시차 적응을 핑계로 가물가물 졸았다. 마침내 똑똑, 일을 마친 남편이 도착했다.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타국에서 만나니 괜히 반가워 종알종알 수다를 늘어놓는다.
며칠간 남편은 학회 일정대로 움직이고, 나는 혼자서 슬렁슬렁 체코 시내를 걸었다. 이십여 년 전에 다녀간 이곳은 이제 기억에서도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혼자라서 느껴지는 외로움이 왠지 사치 같다. 까를교 끄트머리에서 바이올린으로 버스킹하는 사람들의 연주를 한참이나 들었다. 부러움 반, 응원의 마음 반으로 바이올린 케이스에 동전을 남겼다.
정해진 남편의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크로아티아로 갔다.
평소의 여행과 다르게 우리는 마음껏 느긋하기로 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새벽에 집을 나서고, 주말에는 아이들의 떠들썩한 모닝콜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키는 남편의 아침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누가 깨우지 않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 스스로 잠에서 깨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남편이 그 행복감을 느끼는 동안 나는 혼자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 그리고 음악. 커피를 다 마시고 느릿느릿 아침을 준비하고 있으면 남편이 눈을 비비고 일어나 '밥 먹자~' 한다.
남편은 유난히 한식을 좋아한다. 잦은 해외 출장에서도 가장 힘든 부분은 업무가 아니라 식사라고 한다. 양식도 중식도 좋아하지 않는 이 사람을 놀리려고 나는 해외 출장 다녀온 남편에게 꼭 피자 먹자, 스테이크를 먹자고 한다. 이런 한국 남자를 위해서 크로아티아에 도착한 뒤 슈퍼에 가서 작은 봉지의 쌀을 샀다. 그리고는 취사가 가능한 숙소에 묵으며 우리끼리 소박한 음식을 해 먹었다. 저녁에는 고기와 야채를 조금 사서 구워 먹고, 아침에는 전 날 먹고 남은 밥으로 죽이나 누룽지를 끓여 김과 함께 먹는 식이었다.
사실 나는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직접 해 먹는 건강한 음식에 대한 믿음은 있기에,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몇 가지 음식을 집에서 만들어 먹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취미가 없는 요리를 할 때마다 즐겁기보다는 미션 수행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크로아티아에서는 요리가 싫지 않았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본 후 내린 결론은 이랬다. 매일같이 바뀌는 숙소의 주방은 내 것이 아니다. 조리도구도 음식 재료도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그 누구도 근사한 음식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어 낸 이 음식이 별 맛이 없더라도 대안이래 봤자 어제도 그제도 먹었던 피자일 뿐이니. 어자피 승산은 나에게 있다.
집에서 가져 간 작은 통의 고추장을 소중히 아껴 먹으며 나는 마치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모래와 풀로 만든 음식이 맛있으리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