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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쉬는 돌 Jan 23. 2023

please washing & spin dry only



"딩동, 빨래요정 왔습니다."
"내가 갈 건데 뭐 하러 또 가지고 왔어, 고마워"



세부 어학원에서는 빨래를 해준다. 빨래터(?)에 바구니를 맡기면 건조까지 해서 착착 개어 준다.

삼시세끼 밥도 준다. 주말에도 물론이다.

청소는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 아침에 비어있는 리스트가 벽에 걸리 시간을 선택해서 방 호를 적으면 된다. 침대 시트는 일주일에 한 번 갈아준다. 우리 집에서보다 자주잖아?


이것이 내가 세부 어학원을 선택한 이유이다.

15년 만에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그.런.데.

우리가 도착한 후 3주 내내 비가 왔다.

빨래를 맡겼더니 4일이 지나서 찾을 수 있었다. 오매불망 기다린 빨래에서는 눅눅한 걸레 냄새가 풍겨 입을 수가 없었다. 날씨 때문이라 했다. 건조기가 일반화된 우리나라이기에 여기도 당연히 건조기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나라에는 그렇지 않다.

햇살이 좋은 날은 두 시간 만에도 젖은 옷이 뽀송뽀송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뽀송보다는 바삭에 가깝다.)


어찌 되었건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고, 건조기가 없는 이곳에서는 빨래 대란이 일어났다. 먼저 접수된 빨래가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냄새를 풍겨내는 동안, 다음 빨래 한없이 대기 중이었다. 축한 수건이 바구니에서 푹푹 썩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매일 빨래터를 기웃대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

나는 드디어 손빨래를 시작했다. 집에서도 안 하는 손빨래를 하러 내가 여기 왔나, 자괴감이 들었다.(사실 좀 귀찮았을 뿐이지만) 고작 빨래 몇 개 하면서 발로 밟고 아이들을 불러 한쪽을 잡으라 하여 짜고 난리를 쳤다. 기계에 길들여진 인간은 이렇게나 나약하다. 빨래에 관한 모든 기술을 잊었다.




힘들여 빨고 나니 더 큰 관문이 남아있다.

건.조.

있는 힘껏 모든 근육을 사용하여 짰지만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설픈 솜씨였기에, 비치타월을 바닥에 깔고 젖은 빨래를 올려놓은 뒤 꾹꾹 밟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자 다행히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커다란 비치타월을 말려야 하는 더 큰 덫에 빠지게 되었다.

좁은 방 안의 모든 의자와 캐리어, 줄을 이용하여 빨래를 널었다. 안 그래도 습기 때문에 꿉꿉했던 방이 더욱 습해졌다. 덕분에 에어컨을 틀어니 죄 없는 계량기만 신나게 돌아간다.




하루에도 한두 시간을 빨래 소비하다 보니, 드디어 계량기 대신  잠자고 있던 잔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빨래 위에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Please washing and spin dry only!]

몇 시간 후 빨래터에 가보니 내 빨래가 탈수되어 바구니에 예쁘게 담겨있다. 얏호! 성공이다!

안 좋은 냄새가 생기기 전에 방으로 달려가 여기저기 널어둔다. 잠깐이라도 볕이 나면 얼른 밖에 널어 소중한 햇볕을 쐬여주고, 비가 날리면 얼른 가지고 들어가 다시 실내건조.


공들인 빨래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날부터 우리는 냄새나거나 꿉꿉하지 않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같이 간 친구에게도 이 환상적인 방법을 공유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의 빨래 요정이 되었다. 아침 먹기 전에 빨래를 맡겨두고, 한두 시간쯤 후부터 참새방앗간처럼 빨래터를 기웃거린다. 빨래터 직원은 를 보면 안으로 들어가 당연한 듯이  바구니 두 개를 가지고 나온다. 내 빨래, 친구의 빨래.


먼저 빨래를 얻은 사람이 서로의 방문을 두드리고 빨래를 전해주며 암호처럼 말한다. "똑똑, 빨래 요정 왔어요~"

자칫 지루할 수도, 답답할 수도 있는 어학원 생활을 서로에 의지해서 즐겁게 지낸다. 행운이다.




여담.

필리핀에는 과자도, 세제도, 샴푸도 소포장으로 많이 판다. 한국에서는 소포장이면 좀 더 비싼 편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수업시간에 선생님한테 물어보니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아서 한꺼번에 많은 을 구매하기 쉽지 않다고 한다.

이곳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나로서는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다. 커피도 조금씩, 과자나 세제도 조금씩 산다.


빨래를 맡길 때 옆 사람을 흘깃 보니 봉지 섬유유연제 하나를 바구니 위에 올려둔다. 오호라, 저거구나. 나도 슈퍼에서 섬유유연제를 사서 바구니에 올려두었다.

그날부터 내 삶의 질이 또 한 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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