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 사전 지식이 없을 아이들과 함께 우리가 갈 나라들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 빌려다 읽고, <벌거벗은 세계사>나 유튜브를 본 게 다이긴 하지만. 가볍게 흘려 본 것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게 있긴 했나 보다. 건널목 신호등에 표시된 메디치가문의 문양을 알아보고는 아이들이 괜스레 반가워한다.
지출이 크다.
입장료만 해도 일인당 약 5만 원인데 한국어 가이드를 신청했더니 그 또한 일인당 5만 원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우피치 미술관 투어였다. 미리 공부를 하고 오는 것이 좋겠지만 미술이라는 것이 며칠 공부한다고 금방 알게 되는 것이겠는가. 잘 몰라도 평소에 그저 보는 것이 좋아서 미술관을 들락거리는 나지만, 워낙 유명한 작품이 많은 이곳에서는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가이드를 신청했다.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다양한 구성원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중 엄마와 아들팀이 있었는데, 우리 집 1호기와 동갑이다. 가이드 선생님이 "우와, 너희는 이 나이에 유럽여행 오고 좋겠다!" 하신다. 내가 잽싸게 끼어들어 "그럼요, 학교 빠지고 온 게 얼마나 좋게요!" 했더니 1호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웃는다.
투어 시간은 약 3시간. 가이드 선생님 덕분에 미술사 이야기와 숨겨진 뒷이야기, 이탈리아와 유럽의 역사까지도 재미있게 들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은 아이들은 나보다 대답도 잘하며 열심히 선생님을 따라다녔다. 그러다 체력이 소진된 2호기가 슬슬 뒤로 처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왜 안 듣고 앉아있니 (여기 입장료와 가이드비가 얼마인데 좀 더 열심히 들으면 좋겠다..)' 하는 아쉬움에 슬쩍 아이의 등을 떠밀어본다. 아이는 고맙게도 끝까지 설명을 들어주었고 다행히 기념품샵에 도착해서는 기력을 회복해 주셨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미술관 다니는 것을 즐기는 엄마 때문에 온 식구가 미술관 나들이를 했다. 싫은 내색 없이 즐겁게 따라준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저녁은 근사한 곳에서 먹기로 했다. 피렌체에 왔으니 티본스테이크 한 접시 먹어야지. 전날 어플 '더포크'로 예약한 <Antico Ristorante Paoli 1827>라는 레스토랑이다. 티본스테이크를 기다리며, 등심과 안심이 T자 모양의 뼈에 반씩 붙어있다고 설명해 주니 아이들이 신기해한다.
파올리 레스토랑은 내부가 미술관처럼 꾸며져 있어 한층 멋지다.
스테이크 먹는데 국민칵테일 스프리츠가 빠질 수 있나. 사실 맛보다는 기분이 좋아지는 오렌지색 때문에 자꾸 주문하게 된다. 캐리어를 끌던 손에 스프리츠를 들고 있으니 비로소 여행을 즐기는 기분이랄까.
파올리는 더포크라는 어플로 예약하면 30% 할인을 해 준다. 하지만 원래 금액대로 결제를 해 버리는 경우가 많으니 카드를 건네며 다시 한번 확인하자. '더 포크로 예약했으니 할인 부탁해~'라고.
기절할 만큼 맛있는 건 아니라도 근사한 분위기에 오랜만에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니 기분이 좋다. 스프리츠로 말랑해진 엄마의 마음을 아이들이 애교로 공략한다. 못 이기는 척 젤라또를 사주니 세상을 다 가진 듯 예쁘게 웃는다. 언제까지 아이스크림 하나에 저리 행복하려나 싶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어제 처음으로 피렌체를 한가하게 걸었다. 나의 오래된 기억에 남아있던 피렌체 대성당이 골목 끝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을 때, 혼자서 울컥했다. 내가 정말 이곳에 다시 왔구나. 갑자기 펑하고 장면전환이 된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대성당이 너무나 현실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비현실적이기도 해서.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 배낭여행 할 때도 피렌체는 괜히 와보고 싶던 도시였다. 메디치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나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로 인한 내적 친밀감 때문이었을지도. 실제로 오니 생각보다 더 좋았던 피렌체. 그래서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피렌체를 거점으로 주변 도시들을 둘러보기로 하고 5박을 예약했다. 물론 나의 독단적인 선택이었다.
딱히 이유가 없이 호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도시도 그렇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마음. 나에게는 피렌체가 그렇다.
아이들에게는 다른 이유로 피렌체가 좋은 모양이다. 2호기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식 비데에 푹 빠졌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나면 만족스럽게 웃는다. 1호기와 2호기가 동시에 감탄한 것이 있었으니 숙소의 티비다. 벽걸이형으로 소박한 크기여서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리모컨의 기능이 심상치 않아 자세히 보니 스마트티비였다. 아이들이 같이 씻겠다고 하고는 욕실에서 낄낄거리는 동안 이것저것 만져보니 유튜브가 켜지고, 한글로 바꾸어 예능을 검색하니 우리나라와 똑같은 목록이 나온다. 씻고 나온 아이들은 팔딱거리며 좋아한다. 낯선 이국에서 익숙한 프로그램이 나오니 더 반갑고 신기하다고 했다.
물론 여기저기 구경 다니느라 티비를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씻고 누워 한국 예능을 보는 맛은 아이들에게 소소한 기쁨이 되었다. '엄마 아빠는 나가서 맥주 마시고 데이트하고 오세요 = 저희는 티비보고 있을게요'의 공식이 성립하기도 했으니 가족 모두에게 고마운 존재였다고나 할까. 덕분에 로맨틱한 피렌체의 밤거리를 남편과 손을 잡고 걸어보았다.
아이들에게 떠밀려(!) 밤 산책을 나간 날, 걷다 보니 피렌체대성당이었다. 마침 대성당 바로 앞 카페에 빈 테이블이 있어 잠시 앉았다 가기로 했다. 조명이 켜진 한적한 대성당은 밤새 보고 있어도 좋을 것처럼 아름다웠다. 작은 네모 테이블이 열두어 개. 마주 보고 앉게 되어 있어 한 명은 대성당을 등지고 앉아야 했다. 가득 찬 테이블은 커플이 대부분이었는데, 유심히 보던 나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성당이 잘 보이는 쪽은 모두 다 여자들이 앉아있었고, 등지고 앉는 자리에는 다 남자들이었다. 맥주 한잔을 추가하는 남편에게 "이번에는 여보가 이쪽에 앉아봐요. 대성당을 보고 앉으니 정말 기분 좋다."
굳이 자리를 바꾸는 우리를 보더니 옆에 앉은 스페인 커플이 '오!' 하고는 그들도 서로 자리를 바꾸어 앉는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 서로 크게 웃었다. "전 세계 매너남들이 여기 다 모여있네요!"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