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나의 눈에는 달리 보이고]_ 빗방울은 나를 씻기고 비추는 자아의 거울.
물을 거울과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거머쥐지 않으며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것은 받아들이나 간직하지는 않는다.
Roland Barthe , 1970, L'EMPIRE DES SIGNES, Flammarion, 1970, 105.
물이 채워진 유리구
도심 속 건물 실내인데도 그 안에는 여름 소낙비가 한창이다. 유리공예가 서명수의 <Rain Drop> 연작이다. 작가는 어느 날 창을 열어 비 오는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했다. 풍경으로 비를 보았다기보다 그날은 유독 작은 빗방울 하나하나에 눈길이 갔다 했다.
물방울들이 그날 작가의 눈이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폈음을 말해준다.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다. 어떤 것은 형태가 길고 어떤 것은 짧고 끝이 뭉툭하다. 사람의 무리 전체를 보기보다 무리 안에 각자 다른 개성 지닌 사람을 보는 것처럼. 작가는 빗방울 하나마다 특징을 살피고 빗방울 사이의 간겨과 양을 맞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맞는 비의 수량을 맞춘다.
전시장을 걷는 이들 모두 사람과 눈을 맞추듯 거울 곡률에 달리 비친 자신을 비춰본다. 그 속에서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본다.
작가는 빗방울을 만들고 자신이 눈길 둔 그 자리에 빗방울이 위치하도록 천장으로부터 투명한 줄을 내려 매달았다. 그것은 빗방울이면서 거울이다. 투명함의 유혹은 매혹적이다. 마치 나르키소스가 샘물에 비친 제 얼굴에 매료되어 자신을 비추어보고 빠져들듯 전시장의 여느 사람들처럼, 작가가 어느 날 빗방울을 보며 그러했듯, 나 역시도 그 속에 방울 표면에 나를 비춰보고 있다.
서명수, Rain drop, 2018, 갤러리밈
물-거울에 나타난 외관은 진실을 말한다. 나르키소스처럼 작가가 물방울에서 보는 것 역시 자신이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나 작가 모두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는 나르키소스와는 다르다. 작가는 그저 바라보고 꿈꿀 수밖에 없다. 그 안에 몸을 던질 수 없다.
작가가 물방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우리가 그렇게 하길 종용하는 것은 진실 때문이다. 물방울에 비친 나의 잔상은 내가 자신을 비추어 본 마주침의 세계다. 물방울이 비추고 반사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내가 바라다보고 있음을 확인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작가가 재현한 비 풍경은 개체를 하나하나 천장에 매달고 군집화한 풍경처럼 보일 수 있다. 자연 현상을 실내에 재현한 것처럼, 연극 무대처럼 말이다. 그러나 작가가 재현한 비 풍경은 갤러리 천장에 매달린 인공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깜박이는 인공의 세계다. 자연의 빗방울은 내리는 즉시 땅 속으로 스며들고 물과 하나 되지만, 작가가 만든 빗방울은 사라지지 않고 뱅뱅 맴돌기만 한다. 줄의 장력이 중력이 끌어당기는 힘에 비례에 저항하는 것을 우리 눈에 보여주려는 듯 도대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미묘하게라도 흔들린다.
서명수의 <Drop rain>은 작가 자신만이 응시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의 내면 안에 늘 존재하는 매우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순간을 가시화한다. 그것이 요란스럽고 현란하지 않아 오히려 매혹적이다. 한 편의 시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연출하기 위해 작가가 해야 할 유리 작업의 과정은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다. 작가는 이 빗방울을 만들기 위해 우선 규석, 소다회, 석회석, 초석 등을 1240도 화염이 가득한 용광로에 넣어 달구어야 했다. 고온의 액화 유리를 파이프 끝에 묻혀 봉 끝에 입을 대고 가슴 깊이 들숨과 날숨을 거푸 교차하며 불기와 형태 잡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 그 반복 끝에 작가는 영롱하고 투명한 그리고 속이 빈 수백여 개의 빗방울들을 얻었다. 유리작업의 결과물은 아름답지만 뜨거운 요로 안에 재료를 녹이고 막대 돌리고 식히고 불고 당기는 힘든 작업은 제법 고되고 반복적이다. 그러나 자연 재료를 불과 물을 교차하여 투명한 빗방울을 만들고 매단 작가의 결과물은 그 어떤 매체의 풍경 재현보다 아름답다.
작가가 만들어낸 이 모든 환영은 물질 이전에 빛이 있기에 가능하다. 빛은 실제적이며 동시에 잠재적이며 일시적이다. 빛은 무색, 투명한 유리구를 그리고 그 안에 담은 물을 차례로 투과하며 빛을 굴절시킨다. 유리와 물을 연이어 통과하며 회절 하고 산란하는 빛은 우리의 망막 위에서 그리고 전시장의 바닥과 벽에서 반짝거리고 어른거린다. 유리구슬의 투명함과 빛의 효과, 그림자야 말로 이 모든 몽환적 풍경의 원천이다. 천장으로부터 수직 궤적을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중력이 없는 시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듯하다. 물방울은 빛의 방향과 거리, 물방울의 크기와 고저, 밀집에 따라 반응하며 바닥과 벽에 수많은 그림자와 무아레(moire)들을 만든다. 그 모습이 깊은 밤 창을 열어 봄비 오는 것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처럼 황홀하다.
우리가 비 오는 풍경이라 생각하며 보고 있는 이 것은 그저 망막 위에 투영된 이미지, 어느 날의 불분명한 기억 일 뿐이다. 인공 유리 방울과 자연의 빗방울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현상과 닮았다고 생각할만한 우리의 망막 위에 펼쳐진 허상이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몸을 통해 지각하고 촉각 하는 것만이 실재다. 미술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도 우리가 환기할만한 것들, 기억할만한 것들을 환영처럼 불러낸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 삶을 환기시킨다. 전에 없던 새것으로 만든다. 그것이 미술 재현의 힘이다.
작가가 만든 허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망막과 감각을 오가며 보이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기계장치에 가깝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풍경이다.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인가? 당신의 눈 그리고 기억을 믿는가? 우리가 보았다 혹은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은 모두 사실이었나? 혹여 찰나 존재했다 사라지는 허상은 아니었나? 유리 물방울을 만질 수 있고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로 나의 몸을 통과해보며 내 인생 중 어느 비 오는 날의 낭만을 불러낸다 한들, 그것은 사실의 부름일까. 당신이 이 유리비 오는 풍경에서 무엇을 느끼고 불러냈듯 그것은 그저 당신의 감성이고 감정이며, 그 어느 날의 기억일 뿐, 실재는 아니다. 미술은 그렇게 환영으로 우리에게 실재, 진실을 보여준다. ■홍지수_미술평론, 미술학 박사
서명수, <Rain Drop>, 2016, 남서울 이앙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