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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Sep 06. 2022

한국 도예가들의 분청(5)_최성재

4부_우리 미술이 다시 보고, 다시 쓰는 분청_다섯 번째 작가, 최성재


최성재(崔成在, 1962- ), 부여 작업실에서, 2021


최성재(崔成在, 1962- )의 화면은 오리와 버들이 어우러진 수지(水沚) 풍경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정확히 현실의 어느 특정 장소나 때를 재현한 그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작가가 고려시대 상감청자나 분청, 동양 산수화에 자주 등장하던 물가 풍경을 참조하거나 응용한 것도 아닙니다. 최성재 작가의 작업은 자신의 몸에서 오랫동안 다지고 이끌어낸 체화의 몸짓, 숙련된 감각을 가지고 오직 분청 재료와 수법만이 도출 가능한 추상성과 자유분방함, 물성의 세계를 도모하는 데 특별한 면모가 있습니다. 그의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에너지를 손끝에 끌어 모아 화면에 펼치는 절제된 운용의 미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마냥 눈에 선선합니다.



섬광처럼 손끝 잠깐 스친 흔적들이 갈대가 되고 오리가 되고, 바람결, 물결이 된다.



작가의 손은 화장토 뭉근하게 바른 젖은 화면 에서 섬세하고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전광석화라는 말이 이 때 어울릴까요? 단순히 손짓, 도구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에너지, 흙과 불의 물성이 결집해 이룬 심상의 풍경입니다. 작가의 화폭은 편병(扁甁), 원반(盤), 도판(陶板) 등 흙으로 빚고 불로 구운 도자기입니다. 작가는 때로  캔버스에 흙을 발라 도자기에서 시도하지 못하는 다양한 질감과 화면의 넓이를 느껴보기도 합니다. 도자기에 혹은 캔버스 그  무엇에 그림을 그리든 그의 화면은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작가가 그 위에서 무엇을 발생시키고 행동한 인위(人爲) 여기에 흙과 불의 무위(無爲)가 더해져 최종 미감이 형성된다는 데 중점이 있습니다. 이렇듯 작가가 행하고 흙이 공기와 불 그리고 시간과 만나 함께 만든 일종의 ‘진행(進行)’은 사실을 만듭니다.


최성재 작가 역시 이색(異色)의 흙물로 표면을 덮고 정돈하는 분장이 회화의 첫 번째 작업입니다. 그러나 최성재 작가에게 분장은 단순히 회화를 위한 순수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작가가 소재를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하나의 사실로 정착시키기 위한 첫 번째 행동,단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얀 표면은 분장하기 전 어두운 바탕일 때보다 작가의 손짓과 흙이 만난 흔적들이 더욱 잘 보입니다. 귀얄을 비롯한 도구의 종류나 사용 순서, 덤벙의 횟수, 화장토의 농도를 어찌하는가에 따라서도 화면의 두께와 느낌은 많이 다릅니다. 그림의 행위, 건조, 번조로 이어지는 연이은 과정 속에 생성된 수많은 사건들이 켜켜이 화면 위에 쌓일수록 아래 있던 것들은 더 깊숙한 내부로 밀려 들어갑니다. 그 결과 화면에는 수차례 다른 형질이 쌓인 층위가 만들어집니다. 화가라면, 여기서 자신이 보기 좋은 때 손을 떼면 됩니다. 하지만 흙은 건조와 번조라는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수축합니다. 건조 전후 물성. 질감도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나아가 가마에서 고온 번조 후 물성과 도상의 형태는 젖은 흙의 회화 단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화면이 한층 압축되고 다부진 느낌이 듭니다. 작가가 흙의 종류, 화장토, 안료에 따라 운필을 달리하고 번조를 달리할 때마다 사람들이 화면에서 다른 감정, 계절감, 장소를 보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성재,   만추(晩秋) 9,      2011,    51×51×5cm,  분청토, 분청유, 환원소성


최성재,  조우(遭遇),    2016,    30×37×17cm,   분청토, 화장토, 환원소성



작년 가을, 작가의 개인전을 앞두고 평론을 쓰기 위해 최성재 작가의 작업실에 가서 그가 작업하는 것을 꽤 오랜 시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화면 앞에서 작가의 손끝이 잠시 머뭇거리고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순식간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마술쇼나 서스펜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짜릿했습니다. 작가의 손끝이, 도구가 흙의 표면을 잠시 스치고 건드렸을 뿐인데, 화면에 몇 개의 선, 반점이 생겨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얼룩처럼 보이던 것이 몇 번의 흔적을 더해 언뜻 나의 눈에 버들처럼, 오리처럼 보이고, 그것이 구도를 이뤄 풍경이 되는 인지 전환의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짜릿한 전율,긴장이 흐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수작(手作)은 즉흥과 순간적인 영감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원재료(material prima)에 대한 실험과 이해 그리고 오랜 시간 재료와 함께하며 체득한 감응에서 나오는 겁니다.


1990년대 초기에는 작가는 붓 혹은 도칼을 이용하여 화면에 회화를 시도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자연스러운 선과 필력을 얻고자 정형화된 도구보다는 손, 부러진 나뭇가지, 거친 귀얄 등을 사용해 작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회화가 옛 도공의 분청 표현처럼 대교약졸(大巧若拙)하기를, 마음 가는 대로 그려도 과하지 않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기를, 그리고 자신의 표현이 늘 자유롭고 자유분방하기를 갈구하며 작업하고 있노라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오랜 시간 재료, 밀도와 두께, 질감, 색 등 조형요소를 바꾸고 조합을 달리해왔으며,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다작(多作)하는 작가로 꼽힙니다. 다작이 결국 신체성과 수행성, 물성 강한 작가의 독자적 화법을 만들었습니다.     




최성재, 푸른 풍경 3, 백자, 청화,  80×44×1cm, 2015


최성재, 푸른 풍(靑風), 백자, 청화, 지름 38cm, 높이l3,cm, 2015



작가는 자신의 회화를 자신의 마음을 목도하고 불러내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오랫동안 제목을 <마음 풍경>으로 지칭하는 이유입니다. 풍경은 동서양 회화에서 모두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러나 최성재에서 풍경은 주제가 아니라 개념입니다. 작가는 시시각각 유동하고 변화하는 자신의 마음을 도자예술의 다양한 언어-질감, 색채, 도상 등의 조합을 달리하여 표현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화면에서 다양한 계절, 때, 날씨, 풍경, 정황 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어느 풍광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 눈에 그것이 일 년 한 절기, 하루 어느 시간, 어떤 구체적 장소의 풍광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착시’나 편협한 오해에 불과할까요?      

작가가 그린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풍경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아예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작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 역시 작가가 자신의 생 어느 시절에서 보았던 것이 그의 마음에 담겨 있다가 끄집어 올라온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작가의 마음 풍경에서 보는 것도 결국 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우리의 것이 될 때 더욱 풍부한 세계, 나의 풍경으로 의미가 배가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작가가 관객들에게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최성재, 한낮의 호수, 분청, 24×12×33cm, 2016



보는 이가 작가가 만든 것에서 무엇을 보고 느끼려면 시간, 공간이 필요합니다. 화면을 꽉 채운 수려한 솜씨로 풍경을 그렸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면에 비움 즉, 여백이 있어야 독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탐색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이 보고 싶고 생각하는 바를 떠올려 작품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최성재 작업의 중심은 작가가 흔적으로 구성한 도상, 풍경이 아닌 여백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백은 그저 공허이자 부재로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 무엇이든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물결, 하늘, 바람결 그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될 수 있는 불이(不二)의 장소가 바로 여백입니다. 이 때문에 작가는 작업할 때마다 무엇을 그릴까보다 무엇을 얼마나 남길까 고민한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최성재 작가의 분청은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체화시킨 그만의 필력과 감각이 핵심입니다. 그 이미지는 본디 작가의 마음에서 불러낸 것이나 그것이 독자가 어떻게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고 꿈꾸며 대상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지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데 미적 체험의 풍부함이 있습니다. 이처럼 작가는 언제나 우리 미술이 추구했던 격조와 아취, 소박함과 질박함 나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미감을 추구하고, 그의 시선은 전통의 외양이 아닌 우리 미술이 담고 있는 정신세계를 바라보는 데 집중합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격을 허물고 변격을 계속 시도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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