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_우리 미술이 다시 보고, 다시 쓰는 분청_네 번째 작가, 윤광조
순간적 영감이나 천재적 재기를 발흥시키며 작업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삶과 밀착된 일상인으로서 작업하는 도예가의 창작 태도가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 완성도 높은 표현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반면 윤광조 같은 작가들은 오히려 편안함, 익숙함을 배제할 때,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신을 변화 속에 노출시킬 때 어느 것에 얿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연스러움, 자유분방함을 획득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윤광조(尹光照, 1946- )는 1970년대 홍익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는 도자기에 큰 흥미를 붙이지 못해 대학로에 가서 연극배우를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복부를 하며 후일 멘토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자인 최순우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총을 드는 대신 그는 전공을 살려 군복무기간 동안 고려청자 발굴지를 따라다니며 출토된 파편을 정리하는 일을 도맏아 했습니다. 그는 이 시절 고려청자와 분청사기가 혼합된 사금파리를 분리하고 살피며, 제대로 눈과 손, 마음으로 도자기 공부를 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군복무에는 도자기를 하겠다 마음을 먹고 종로, 을지로 일대 중고서점을 다니며 일본인들이 저술한 도예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복학해서는 홍익대 교수였던 원대정 교수 등에게 물레 성형을 배웠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경기도 광주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부러 당시 도예촌이 형성되어 있던 이천, 여주에서 떨어진 곳,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자기 작업을 꿈꾸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그는 물레 성형을 버리고 석고틀 성형이나 손성형에 주안 한 형태를 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물레성형 특유의 기계적 속성과 반복성, 기술성에 매몰되거나 익숙해지지 않고 나아가 원형성(圓形性)을 탈피한 자연스럽고 새로운 비정형의 형태를 얻기 위한 작가의 결단이었습니다.
윤광조 분청 작업의 특질은 표면 처리 즉, 회화에 있습니다. 그는 하얀 분을 칠한 바탕 위에 귀얄, 덤벙, 음각, 돋을 선 등 다양한 기법을 조합하여 변주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되도록 도구를 사용하기보다 손, 볏짚이나 동물의 털을 모아 만든 귀얄 등을 사용해 흙의 물성과 자유로운 작가의 몸짓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제작 방식이 옛 분청을 비롯한 과거에 없던 그만의 독자적 형태와 문양을 만들어냅니다. 그가 중시하는 ‘자연스러움’은 비 인위(非人爲)를 배격하고 자연물의 선과 형을 닮은 사물을 만드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이를 위해 윤광조는 공예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완성도 이외에 작업하는 과정에서 작업자의 마음 상태 즉,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정신의 물질적 발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1976년 법정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참선과 묵상을 생활화하는 작가의 태도에 연유한 것이지만, 인간의 인위(人爲)를 충돌 없이 자연스러움으로 인종하는 옛 도공들의 창작 방법을 분청의 본질이자 우리 도자 전통의 중심요소로 간주하는 작가의 창작 태도이자 지향입니다. 또한 전통을 과거로 이어받은 결과물이 아니라 전통의 본질을 정신의 문제로 보는 윤광조의 전통 인식에도 기인합니다.
과거의 것과 가시적인 것이 닮았다고 해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을 잃은 형식의 모작은 원본과 흡사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말이다. 외적 형식의 유사성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잉태시켰던 내적인 존재를 감지하고 공부하여 새로운 독자적인 조형으로 표출될 때 미래로 향한 도도한 전통의 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윤광조 개인전 전시도록. 1981. 10월, <서문> 중에서
윤광조 작가의 전통 해석은 주변의 자연환경을 기형의 원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자연풍경을 보고 그 인상을 손톱을 동반한 손가락과 거친 지푸라기 등으로 자유롭게 시문하는 <바람골> 연작 그리고 바짝 마른 표면에 날카로운 도구를 세워 한 번 세기면 다시 수정할 수 없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연작으로 작품을 진격시켰습니다. 작가가 처음 작업을 시작할 시에는 그림 혹은 문양을 그린다는 인식 아래 무엇인가 작업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기 마련입니다. 문양이든 그림이든 처음 시작하는 것은 작가의 의지, 욕심 등이 실려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작업에 집중할수록 그림을 그리고 글자를 쓰는 일은 같지만, 작가의 머릿속에 그림 혹은 문양을 '그린다'는 인식은 점차 사라집니다. 그 순간에는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순간입니다. 그것은 그리고 있으나 ‘그리지 않는 그림’입니다. 그 초집중의 세계,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무위(無爲)입니다. 2007년 이후 <카오스> 연작이 그 시작입니다. 작가는 카오스 연작에서 그린다는 인위 의지마저 버리고 철저히 농도와 종류에 따른 화장토의 다양한 자연 물성을 따라가고 포착함으로 ‘무위(無爲)’의 화면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연작들은 조금씩 표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규율과 엄격함, 인위를 거부하고 인간의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창작행위를 한 개인이 정진하여 도달한 정신 수행의 영역으로 발현시킨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작가의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멍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작업에만 집중하고, 그 순간 물질, 도구에만 나의 몸과 정신을 일치시키는 것으로서 작업에 필요하지 않은 상념, 걱정 같은 여타의 부질없는 것들은 들어올 여지가 없는 순간입니다. 윤광조는 무위의 단계로 자신의 작업을 최대한 가까이 진격시키려 외딴 곳에 작업실을 짓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조심하며 사는 삶의 실천을 해온 작가입니다. 이것이 마치 신비적이거나 괴팍한 작가정신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옛 분청의 자유로움, 자연 분방함, 재료의 본성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방법,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