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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Sep 01. 2022

한국 도예가들의 분청(2)_신상호

낭창한 대나무칼로 긋고 흙으로 덮고 깍길 거듭한 '화이부동'의 화면

4부_우리 미술이 다시 보고, 새롭게 만드는 '분청'_두번째 작가, 신상호



신상호(申相浩, 1947- )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 현대 분청의 새로운 장을 연 신상호(申相浩, 1947- )의 작업에는 다양한 자연 소재가 등장합니다. 작가는 고향, 동심의 세계, 자연으로의 회귀를 매개로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려 했기에 작품에도 자연스럽게 새, 나무, 물고기, 산, 꽃, 돌, 갈대 , 풀숲 등 도상을 사용했습니다. 모두 우리 곁에 늘 쉬이 볼 수 있고 관찰할 수 있으며 풍취를 경험할 수 있는 익숙할 자연입니다. 

옛 분청의 자연 도상들은 자연물 내지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귀와 안녕, 자손만대와 장수, 신분상승 등의 길상의 욕망을 상징하는 상징 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상호의 자연 묘사는 서양의 그림처럼 자연을 모방하거나 근접하여 자연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연 대상을 바라보되 외형을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일정 거리를 두고 주관적 감성으로 관조하고 자기표현으로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것은 옛 도공 그리고 동양미술이 실천해왔던 익숙한 창작 태도이자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신상호는 여기에서 한발 나아가 자연 자체의 선 즉,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신명과 체화의 선을 찾기 위해 인공물 대신 자연의 소재들을 기(器)의 화면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신상호(Shin Sangho, 1947- ),      Dream      1991, 37x39(h)cm



이를 위해 신상호는 붓 대신 대나무를 예리하게 깎은 다양한 칼과 꼬챙이를 손에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문지, 그다음에는 화선지에 붓으로 옛 도안, 산수 표현을 찾아 연습을 하며 몸에 필력을 장착했습니다. 익숙해지고 능란해질 즈음, 붓대신 대나무칼을 쥐고 새로운 선을 구현하고 종이가 아닌 흙에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는 옛 것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단 있는 성격을 닮은 선, 격에 갇히지 않고 원하는 바를 그려낼 자유분방한 선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끊임없이 그림의 바탕이 되는 형태를 달리해 보기고 하고 형태도 달리해 보고 조합을 달리해 다양한 표현을 타진해 보았습니다. 그의 선들은 옛 선을 되살리거나 따라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밝혔듯 이성보다 감성을 우선하고 장애와 실패, 불합리한 것들을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고자 하는 자신의 성향을 대변하는 독자적이고 개인적인 선입니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파고, 메우고, 다시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작업은 한 기물의 화면 속에서 오히려 단순해지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화면을 지향합니다.


앞서 말했듯 회화의 도구인 붓과 대나무 칼과 인화 도장의 사용법은 전혀 다릅니다. 작가가 적절한 예리함과 강도, 속도와 힘의 완급조절, 순간 방향을 바꾸는 코너워크를 흙의 말캉말캉한 표면에 원하는 깊이로 헤집고 파내고 그을려면 완급조절과 스냅이 필수입니다. 뭐든 자유자재로 구사하려면 그만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대나무 칼만큼 흙의 저항을 받아낼 적절한 강도와 탄성을 지닌 재료도 없을 겁니다. 그는 대나무칼로 면상감, 선상감, 박지, 문지르기, 깎아내기 등을 시문 하고, 그 위에 다시 조화, 귀얄, 덤벙, 인화 등을 자유롭게 조합했습니다. 그리고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린 자리를 다시 화장토로 덮고 깎아내는 행위를 횟수 제한 없이 원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반복합니다. 옆에 사람들은 그 치열함에 넋을 놓고 상념을 토로하기 마련이죠.

이처럼 작가가 분장한 흙의 표면을 파고 다시 물질을 덮고 이를 깎아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모종의 깊이를 얻기 위함입니다. 가마에 고온의 불을 올리고 식히는 것이 1회라면, 번조 횟수 역시 제한이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나올 때까지 반복합니다. 예사 도예가들이 한두 번 번조에 그치는 것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집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흙을 파내고 덮고 갈아내길 수십 번, 번조를 거듭하여 얻은 이 물질과 행위의 깊이는 수학적 깊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 속에 들어가면 아무리 덧바른 물질이라도 가라앉아 압축되고 흐르기 마련이라 기물의 물리적 깊이는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가들이 캔버스 위에 물감을 붓고 표면을 긋고 다시 벗겨낸 물질적 화면이 더 두꺼울지도요.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깊이와는 별개로 불로 구운 도예의 화면은 깊이감이 남다릅니다. 이것이야말로 회화라는 행위는 같으나 이 매체를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요.



신상호(Shin Sangho, 1947-  ),      Dream 9029,   1990,   40x45cm



신상호 분청의 표현, 형태는 힘이 넘치고 많은 도상들이 화면에 등장하지만, 실상 우리 눈에 거슬리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편안함을 줍니다. 다양한 조형 요소의 조화로움은 작가가 여러 번 환원 소성을 거듭해 얻은 짙푸른 바탕색의 역할이 큽니다. 차분하고 단단하게 밀착된 표면 그리고 그림을 덮거나 가리지 않는 적절한 광택을 갖춘 잿빛의 바탕은 대나무 칼로 강하게 빠르게 파고 그은 후 채운 하얀 상감의 너른 여백과 대비를 이룹니다. 작가는 이를 위해 환원소성, 즉 번조시 산소 공급을 줄여 흙과 가마 속에 있는 산소까지 온전히 소진시켜 성질을 모두 바꾸는 번조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흙 속에 포함되어 있는 붉은 산화철 성분은 잿빛으로 바뀝니다. 압축된 잿빛 바탕이 다소 예리함과 강하기만 할 수 있는 인간의 필력을 아우르고, 복잡한 기법과 도상들 간에 일어날 충돌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그것은 천재적 영감이나 순간적 감흥의 발산이 아입니다. 과학자처럼 철저한 계획에 의한 시도 그리고 옛 도공들이 그러했듯 다작(多作)과 반복을 통한 기술적 체화, 끊임없는 재료와 기술의 실험과 혁신을 통해 이룬 것입니다. 신상호의 분청은 단순히 도자기에 실용성과 심미적 요소를 부여하기 위해 표면을 채우고 장식하는 전통의 개념을 벗어나 그는 자신이 지향하고 나아가 현대인이 귀의하고 싶은 자유로운 세계를 한 개의 조형물이자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옛 분청의 공예 성과는 다른 지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상호가 분청을 처음 시도할 1990년대 중반에는 한국 현대 작가들 중에 분청에 관심을 두는 이가 별로 없었습니다. 작가도 조형작가로서 활동을 한참 넓히던 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연수 후, 그는 서구에서 배운 조형 방식을 내려놓고 전통을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시도했습니다. 신상호의 분청의 진가는 옛 분청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작가가 끝이 어디인지 없는 불가능, 미지가 예견됨에도 꿋꿋하게 현대의 재료와 기술을 끊임없이 접목하고 개발하여 결국 과거 그리고 동시대 분청 표현과 차별화되는 독자적 표현을 성취했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불투명한 미래 앞에 도전을 두려워합니다. 확실한 선택, 안전한 선택만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나태는 언제나 그 안전함과 확실함에서 나옵니다. 저는 그것이 작가 정신의 실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상호(Shin Sangho, 1947-  ) , Dream 9114,   1991,  17x27x46(h)cm


신상호 분청 특유의 추상성, 긴장감과 역동성은 평면과 입체를 가릴 것 없이 허허한 화면을 거침없이 종횡무진 질주하고 에두르는 특유의 스트로크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가의 표현을 이뤘지만, 그는 다시금 새로운 조형을 찾아서 형식을 바뀌었습니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일정한 형식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것도 원치 않는 작가의 성격과 작업 스타일 때문입니다. 신상호의 분청 연작의 제작시기는 150여 년 짧은 기간 제작되고 사라진 옛 분청처럼 고작 5년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상호의 분청 연작은 이후 1995년 동물의 머리를 두상화한 <머리> 연작부터 <구운 그림(firing painting)> 그리고 최근 작업하고 있는 <상록수> 연작을 관통하는 구심점이자 실마리입니다. 그의 분청 작업은 이후 등장하는 한국 도예가들의 전통의 재해석과 현대화를 이해하는데도 유효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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