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시간’

재료가 아닌 인간이 헤아리기에는 아득한 시간이 깃든 타임캡슐 그리고 생명

by 홍지수

[한국 공예, 오늘은] _2



요즘 한국 공에계에는 부쩍 ‘시간’을 작업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다. 시간이라는 주제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생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와 근원을 사유해온 이래 궁구해온 레퍼토리가 아닌가.동서양 문학, 음악, 공연예술 매체가 자신들의 관점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의 유속을 찬미하거나 통탄해왔다. 그럼에도 왜 젊은 공예가들은 부쩍 시간을 자신의 작업 주제로 택해 작업하려할까? 왜 이들에게 '시간'이 새삼스러워졌을까?

우리 모두는 2019년 이후 코로나 팬데믹 동안, 도예가들이 작업실이나 집에서 홀로 격리되어 답답하게 보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밖에 자주 나다니거나 누구를 만나고 다녔던 것도 아닌데, 홀로 있는 시간이 새삼스러워졌다. 원래 작가에게 작업은 홀로 하는 것이다. 재료와 독대하는 그야말로 벌거 벗은 시간이다. 그러나 경험이 적은 작가들일수록 반강제적인 세상과의 단절, 갑작스러운 자기 독대와 고립의 시간이 무척 고요하고 적막함을 토로한다. 시끄러운 바깥 시간 덕분에 물질을 주무르고 작업하는 시간 그리고 자신의 생애에 대해 깊이 반추하고 체감하는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결국 삶이 예술의 토대이자 작업의 근간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시간에서 새로운 작업을 끌어내고 펼치는 법이니, 새삼스러워진 그들의 시간을 그리고 그 시간을 채운 자신들의 노동과 사유의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긴 결과가 지금 현장에서 내가 보고 있는 '시간 작업'들인 듯 싶다.



물질을 만지고 작업하는 ‘일의 시간은 기실 공예가만의 것은 아니다. 같은 시간을 작업으로 보내도 어떤 재료와 도구를 만지고 체감하는가에 따라 각자 기억하고 얻은 바는 다를 것이다. 어떤 재료를,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재료와 자신이 선대로부터 배운 기술에 깃든 시간을 가장 절실히 느낄까. 나는 아무래도 '흙' 그리고 그것을 신석기시대 이래로 주무르고 누르고 빚어온 도예가들이 가장 긴 시간을 체감하지 않을까 싶다.

도예가들이 흙을 만지고 느낀 ‘시간’ 혹은 흙을 통해 가시화시킬 수 있는 ‘시간’은 어떤 것일까. 매체 불문 모든 작가에게 재료는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통로다. 도예가에게 흙은 곧 세상을 간접적으로 이해하고 접근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도구다. 도예가는 의도하지 않아도 매일 흙을 만지고 구우며 몸에 밴 감각과 습으로 세상을 보고 응대한다. 재료를 만지고 대하는 감각과 태도가 다른 물건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옮겨간다. 흙이 곧 제 눈에 안경이다. 흙을 선택한 것은 곧 흙의 언어로 세상을 살고 보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따라 흙(土)을 감각의 경로이자 격물치지의 도구로 삼는 도예가들이 이해하고 체감하며 표현하고자 하는 시간 역시 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흙(土)은 무엇인가? 흙을 뜻하는 한자 ‘土’는 자연에서 본뜬 상형문자다. 세로 기둥에서 위로 솟은 것은 식물이요, 아래는 뿌리를 뜻한다. 위의 가로 막대는 지표면을, 아래의 가로 막대는 암반을 의미한다. 결국 ‘土’은 식물과 생태계를 지탱하는 기반을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과 다름없다. 흙을 토양이라고 부르면 ‘암석이 풍화된 것에 식물 시체가 섞인 상태’를 지칭한다. 어느 날 죽어 자연으로 돌아간 생물이 다시금 새로운 생물을 키우는 자연 생태계의 순환성이 ‘토양’이라는 단어 안에 담겨있다. 따라서 토양에서 ‘토(土)’는 흙이지만 ‘양(壤)’에는 생물이 생장하기 좋은 비옥한 상태라는 양태 조건이 붙는다.

흙이 토양이 되려면 수백 년에서 수백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긴 시간이 걸린다. 수백 년 된 흙은 수천 년, 수만 년 된 흙에 비하면 애송이 수준이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정도는 되어야 어른 즉, 무르익은 흙이 된다. 흙의 시간은 그야말로 인간이 헤아리기에는 아득한 시간이다.


흙의 시간을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언급해 보자면, 지구는 약 46만 년 전에 태어났다. 그러면 지구 최초의 시간부터 흙이 존재했을까? 흙이 생성되려면 생물이 있어야 한다. 바닷속 생물이 육지로 올라가 살다가 죽고 거듭 쌓여야 흙이 탄생한다. 이를 유추해 보면 흙의 탄생은 지금으로부터 겨우 5억 년 전이다. 무려 41만 년 동안 대지에는 육상 동식물이 없었다. 5억 년도 절대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약 46만 년에 달하는 지구의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루하다. 5억 년이든 46만 년이든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선 도통 헤아리기 쉽지 않은 시간인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지금을 인류세라고 하나, 인류세 이전에는 공룡이 세상을 지배했다. 메마르고 황량했던 땅이 토양이 되어 식물이 그 위에서 생장한 시간, 인간을 비롯한 생명이 살기 시작한 시간은 지구의 시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미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류세를 사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세로 동식물을 군림하며 산다.



광합성을 하는 식물은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CO₂)를 발생시키고, 죽으면 미생물이나 동물에 먹힌다. 대부분 대기로 돌아가나 그중 남은 것들은 부식되어 토양이 된다. 낙엽이 쌓이고 부식되면 점토와 서로 섞이는데, 이것이 쌓여 대지를 형성한다. 토양의 생성에는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큰 역할을 한다. 지렁이가 없다면 땅은 어떻게 될까? 지렁이는 낙엽과 점토를 먹는다. 장내에서 잘 섞어 알갱이 모양의 똥-단림을 배출한다. 매일 꿈틀꿈틀 흙을 일구고 아래위로 뒤섞는 미물 지렁이야말로 부드러운 토양 즉, 건강한 생태계 생장의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존재이다. 이처럼 흙이 암석의 풍화뿐 아니라 동식물의 생사 순환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은 유한한 우리가 흙, 생물, 지구, 우주를 아우르는 영겁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생명으로 넘치는 대지는 부드럽고 따듯한 어머니와 같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자신이 살 곳, 먹을 것을 구하고 번식하기 위해 투쟁하는 생물의 삶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은 지상에 존재하지 못하고 멸종되었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 역시 식물과 동물처럼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인간을 뜻하는 영어 단어 ‘human’은 ‘humus(부식)’에서 왔다. 인간이 흙에서 유래했음이 어원에도 담겨 있다. 우리도 생존에 필요한 영양성분들을 흙으로부터 공급받고 있다. 물과 공기 이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식재료의 섭취로 얻는다. 인류의 역사는 인류가 흙을 경작하고 이용하여 생의 유지에 필요한 영양분을 획득하기 위한 여정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흙을 재료로 형상을 빚고 그것을 불로 굽는 일이 도자예술의 기본 과정이다. 지구의 피부이자 인간을 위시한 생물들의 터전, 언제나 생명으로 넘치는 대지이면서 동시에 멸종된 수많은 생물의 묘지인 흙을 두 손에 주무르고 모종의 형상을 빚고 불로 다시 회귀할 수 없는 고착화된 형상으로 만드는 일은 흙의 시간, 그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식물, 곤충, 공룡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을 화석 혹은 영원한 소멸로 귀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가 그 일에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흙을 고온의 불로 굽는 것은 앞서 죽고 부식된 생이 새로운 생의 바탕이 되고 일부로 영속하는 자연의 순환성을 중단시키는 일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연히 사유와 신중함은 필요하다.

결국 도예가가 해야 할 사유와 실천은 흙의 시간, 흙 속의 존재들, 그리고 갈색 토양 아래에서 반복되어 온 경쟁과 공생을 둘러싼 5억 년의 시간을 사유하는 일이다. 더불어 1만 년에 걸쳐 인간이 짜온 농업과 생산, 기술, 그리고 환경파괴도 다시 살펴볼 일이다. 영겁이 깃든 재료, 한번 구우면 그 안에 살아있는 생명을 정지시키고 자연 속에서 순환할 수 없는 재료인 흙을 다루면서도 때로 가볍게 친환경 열풍에 휩쓸리거나 과도한 비판론 앞에서 줏대 없이 정작 문제의 본질인 흙작업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함부로 재료를 대하는 도예가가 어디 있을까 싶지만, 값싸고 물처럼 고갈되지 않을 것 같으니, 어디서나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소홀히 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흙으로 무엇을 만드는 일, 의미나 기능을 담는 일을 예술로, 공예로도 승화시킬 수 있지만, 흙이 재료이기에 앞서 시간이 깃든, 현재 진행형의 생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도예가는 도자예술에서 ‘시간’이 흙의 시간이 아니라 재료에 자신의 시간을 주입하고 있지 않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자. 흙이 걸어온 5억 년의 장대한 시간 그리고 그와 함께한 동식물의 생투를 살피다 보면 흙의 실상, 위기와 막막함 앞에 맞서고 적응하려 했던 치열한 생명력이 다시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존재를 묻는 일이다. 왜 흙으로 작업하는가, 나아가 나는 흙으로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가를 근본부터 되돌아보고 재확인,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도예 즉, 흙과 불 작업의 출발점이다.■ 홍지수_공예평론, 미술학박사.CraftMIX대표


----------------------------------

본 글은 월간도예 2025년 1월호 공예칼럼 홍지수의 <소소담화>에 '다시 상기하는 흙의 시간'을 제목으로 기 실린 바 있습니다. 사전동의 없는 본 글의 무단 복제, 편집, 캡처, 인용, 공유 등을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동감, 존중, 배려가 글쓰기에 큰 힘이 됩니다. 필요하신 경우, 댓글이나 메일(ceratique@naver.com)으로 협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국 공예의 ‘힙(Hip)한 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