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긴장감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뭔가 자극적인 걸 읽고 싶었던 걸까? 이 책은 그간 소개한 책들처럼 어떤 들끓는 나의 갈증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내 손으로 들어온 책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얻어걸렸달까? 절대적으로 보고 싶어서 구입하게 된 책은 아니었고, 다른 책을 구입하면서 뭔가 영화 기생충을 모티브로 한 책 표지(기생충은 포스터에 등장인물들의 눈이 가려져 있는데, 이 책 표지에는 입이 가려져 있는 장면)가 인상적이라 충동적으로 장바구니에 넣은 케이스였다.
'조용한 아내가 도대체 뭘 어쩌는데?'
이런 그냥 단순하고 원초적인 질문이 이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시작이었다.
생각보다 책은 술술 금방 읽혔고, 한때 저녁 안방극장을 점령한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었던 <부부의 세계>와 묘하게 닮은꼴이었다.
과연 부부들의 세계는 무엇일까? 서로에 대해 안다고 다 아는 게 아니고, 귀 닫고 눈 감고 모르는 척도 할 수 없는 그 미묘한 줄다리기. 이 책에 등장하는 조디와 토드의 관계도 그렇다. 주인공인 '조디'는 아들러 연구자로 심리상담사로 일한다. 그녀는 강박적일 만큼 깔끔하고 청결하며 모든 일을 주도적이고 계획적으로 해내고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마저도 철저하다. (특히 그녀의 평소 라이프 패턴에 대한 묘사에서 나는 많은 흥미를 느꼈다.)
그녀와 20년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는 남편 '토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았지만 일찌감치 건축일로 자수성가 한 사람이다. 이 둘의 관계는 더없이 평화롭고 균형적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심심한 구석이 있다. 토드는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지만 부부 사이의 안정적인 생활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그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며,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그도 안다. 그러나 부부의 관계는 유지된다. (책에서는 이렇게 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여전히 강한 의문이 든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걸 알면서도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니...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현재 유지하는 이 평화로운 가정생활과 그것이 주는 행복이 내게 너무나도 중요하다면 이 모든 평화를 깨지 않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모종의 조건 정도로 상대의 외도를 눈 감아줄 수 있을까?
이 세상엔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부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든다. 특히 자식이 걸려 있는 경우엔 많은 부분 희생을 감내하고 참고 사는 부부가 많다는 사례들만 보아도 그렇다.
폭탄을 발아래 숨겨두고 덮어놓은 땅에 꾸며 놓은 꽃밭 같달까?
그것을 감내하는 이들의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토드는 그의 친구의 딸 나타샤와 불륜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나타샤는 임신을 하게 된다.
토드는 조디와 헤어지려 하고, 조디는 토드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들은 안 봐도 뻔한, 흔하디 흔한 전개 수순을 거친다.
토드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분별없고 제멋대로인 어린 나타샤에게 휘둘려 살고, 판단력이 흐려진다. 처음에는 불장난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시작했지만 이후의 그는 다시 평온하고 분별력 있는 아름답고 고상한 조디를 그리워한다. 마치 부부의 세계에서 등장한 이태오의 내적 갈등과 오버랩된다.
본처를 버리고 바람녀에게 갔지만, 막상 가니 본처가 생각나는??
그래 놓고 내뱉은 세기의 망언이 생각났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그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겠지.
그렇지만 그 사랑을 하겠다고 누군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을 하고, 상처를 준 것에 대한 대가와 책임은 져야 하는 게 공평하겠지.
이 책이 잘 읽혔던 장치 중 하나는 바로 그 남자, 그 여자로 번갈아가며 같은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자세한 심리 묘사로 교차하여 서술한 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의 작가 A.S.A. 해리슨은 실제로도 심리학과 철학을 전공하여 세밀한 인물의 감정 변화와 그 이면에 숨겨진 내면의 비밀, 심리와 상황적 묘사들을 촘촘하고도 얇게 핀셋으로 양파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듯 파헤친다. '아들러 심리학으로 샅샅이 파헤쳐 쓴 가정 스릴러'라고는 하지만 무언가 긴박하거나 손에 땀을 쥐는 반전, 목을 옥죄어 오는 서스펜스보다는 차갑고 느리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묘한 차분함이 주는 긴장감을 즐기면서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