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전 세계가 패닉에 빠진 코로나가 정점에 달한 2021년 여름.
방학을 맞이한 나 또한 패닉의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인생의 유일한 낙이었던 여행을 포기하고 살게 되면서
제발 내 안구 안에 새로운 풍경을 담아보고 싶다는 열망은 계속되었고, 그 대체재로 수많은 해외여행 프로그램이며 어촌 산촌 농촌을 쏘다니며 진행되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은 다 섭렵했던 그 시기쯤,
우연히 동네 서점에 들렀다가
홀린 듯이 집어 든 두 책이 바로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기록과 모든 요일의 여행이었다.
스르륵 책장을 넘겨보다 짤막짤막한 글과 함께 담긴 사진들의 색감이 너무 따사로워서.
그간의 내 억눌렸던 여행 본능을 분출하기에 딱 제격이었던 그야말로 취향저격, 안성맞춤, 내 마음의 백신과도 같은 책이었다.
집에 와서도 한 챕터 한 챕터 너무 빨리 읽지 않으려 애를 썼고 다 읽어버리면 그다음은 볼 게 없어질까 봐 아껴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 아..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왜 이리 나. 짠한 거지?)
일단
이 책의 구성이 참 마음에 들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적절하다.
읽다: 인생의 기록
듣다: 감정의 기록
찍다: 눈의 기록
배우다: 몸의 기록
쓰다: 언어의 기록
특히 배우다: 몸의 기록인 부분이 와닿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저주스러운 기억력으로 모든 것을 경험해나가고 기록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님의 숨김없는 고백이 글 전반에 걸쳐 나오는데 모든 것이 머리로 기억되기보다는 몸으로 체화된다. 몸으로 기록되어 있다. 는 부분이 어떤 뜻이지 알 것만 같아서 오랫동안 곱씹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한때 박사 논문 연구 소재로 썼던
들뢰즈의 '-되기' , '몸의 감각', '감응'과 같은 개념들을 이렇게 뜻하지 않은 장소?? 에서 그녀의 인생 사례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에서 일 것이다.
따뜻하고 정겨운 그녀의 글 중 유독 인상 깊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에 포스트잇으로 붙여 놓았는데
다음과 같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읽었다,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그건 읽은 것일까?
마흔이 넘어 내게도 셰익스피어의 시간이 올까? 간절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어디 셰익스피어뿐이겠는가? 내 책장에는 언젠가 내가 새롭게 발견해주길 기다리는 책들로 가득하다.
도스토옙스키도, 톨스토이도, 카뮈도, 그 밖의 수많은 작가들도 모두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이미 거쳐 간 책들도 모두 자신의 시간을 숨죽여 다시 기다리고 있다. 그 책의 시간은 언제일까. 알 수 없다.
다만 사람과 책의 관계에도 때와 환경과 감정의 궁합이 맞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32-33)
책과 나와의 궁합. 맞다. 존재한다.
어릴 때 읽었던 감정과 나이 들어 읽었을 때의 감정이 확연히 차이나는. 어느 때에는 너무 당혹스러울 정도로 갭 차이가 느껴지거나 왜 그 당시의 나는 이 책을 읽지 못했었던가.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를 텐데... 하며 후회가 몰려왔던 경험이 있다.
바로 나의 경우엔 데미안. 그리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감동의 후폭풍을 경험한 레미제라블이 그것이다.
또 어떤 책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고전 읽기도 참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p.59)
(인용구,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무슨 문장이 이렇게도 우아할까? 싶었다.
나 자신을 깨우치는 몇 개의 문장. 그 어떤 스승님 보다 위대하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김민철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글이 형식에 얽매인다거나 기교가 들어갔다거나 누군가를 가르친다거나, 교훈을 주려고 했거나 자기 자신을 포장하려는 노력이 없이 담백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참 편안했다.
책 표지처럼 하얗고 투명하게 자기 자신의 한계점, 불행, 저 깊숙이 감춰두고 싶은 어두운 구석들,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생채기 난 약점까지도 모두 인정하고 소화하고 녹여내며 자신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걸어왔던 인생의 길들을 따뜻한 시선과 진심을 담아 활자로 쳐낸 문장들. 글자들이었다.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가려고 노력해본다.
참으로 아껴주고 싶은 온화한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