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웃을 수 없는 공포가 궁금하다면?
어느 날 갑자기 내 의식의 흐름이 불현듯 김영하 작가님의 <살인자의 기억법> 책에 가 닿았다.
워낙 이야기의 존재감이 또렷하고, 영화로도 나온 내용이라 전체적인 줄거리는 생각이 나는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딱 멈춰 그 이후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았다.
'엇! 이 책 어떻게 끝났더라?'
사실 책의 결말이 기억나지 않으면 곧바로 네이버나 구글에 쳐 보기만 해도 좌르륵 나오겠지만, 어쩐 일인지 그날은 하루가 다르게 감퇴하는 나의 기억력을 시험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 책 제목이 살인자의 기억법이었어서 그런지 괜한 오기가 생겨 머리를 짜내고 짜내다가 결국 포기.
다시 읽기로 했다.
책을 결코 빠르게 읽지 못하는 스타일인데
이 책은 친구를 만나러 서울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오는 여정 동안 한 권을 다 끝낼 수 있었다.
그만큼 누구나 읽어도 미친듯한 속도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일단 굉장히 남성적인 단조롭고 기교 없는 문체.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다만 그 내용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플랫 하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주인공의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이 단락별로 나뉘어 있어
내가 주인공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듯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간다.
뮤지션 이적은 이 책을 읽고 '굉장한 파괴력. 단숨에 읽히지만 긴 후유증이 남는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나 또한 단숨에 읽었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이 책에 대한 또렷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살인자의 기억법은 나지막이 조용하고 차가운 저녁 어스름의 공기와 축축하게 젖은 땅의 감촉이 떠오른다. 마치 내가 그의 앞마당에 묻힌 그녀가 된 듯.
그가 그토록 지켜내고자 했던 은희는 도대체 처음부터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인 걸까?
책장을 덮는 마당에는 도무지 이제 뭐가 진실이고 어디에서부터 희미해져 버린 기억인지 알 수 없어진다.
그의 기억은 어디에 뿌리를 두는가.
기억이 사라진 사람. 자신을 이루고 있는 근본을 잃어가는 사람의 존재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이 책이 출간된 2013년에 바로 구입해 읽었으니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한번 감염된 이후 급격한 기억력 감퇴를 겪고 있는 내게 상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육신은 살아 있어도 희미해져 가는 정신과 기억을 붙들기 위해,
세상의 투명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인가.
치매를 오래 앓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를 보며 괴로우셨을 아빠의 마음이 떠올랐고, 아흔이 넘어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쇠약해진 모습과 노망난 모습이 떠오르고 그런 외할머니를 어쩌지 못하는 엄마의 애달픔도 떠올랐다.
가까운 미래에 연로해지신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알츠하이머로 고생하는 모습을 이제 내가 겪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더 이상 저 멀리에 있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과 시간의 문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