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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콤불닭순한맛 May 28. 2023

읽고쓰다 #12. 여행의 이유

여행에 대한 김영하 작가님의 생각 모음집





커피 한 잔에 샐러드를 곁들이며 글을 쓰는 이 여유를 감사히 여긴다.


오늘의 책도 또 여행이다.

여행이라면 빠질 수 없는 대표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 다.


여행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여행을 하는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

여행에 관한 심도 있는 물음들을

본인의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엮어 풀어놓았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에 대한 생각 모음집이랄까?


여행을 너무 사랑하는 나 이기에,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책을 너무 좋아하는 나 이기에

이 두 가지 교집합을 충족하는 '김영하가 쓴 여행책'은 무조건 우리 집 책장에 꽂힐 운명이었지만

생각보다 여행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소재와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내용에

두 번 세 번 읽게 되는 묘한 책이다.




꼭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동해 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중략)

인류는 걸었다. 끝도 없이 걷거나 뛰었고, 그게 다른 포유류와 다른 인류의 강점이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 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데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p.117)




어떤 도시에서 여행자들은 현지인처럼 보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여행자의 표지들, 예컨대 커다란 배낭, 편안한 신발, 손에 든 지도, 카메라 등을 숨긴다. 마치 모처럼 휴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현지인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은 여행자들이 선망하는 나라와 도시에서만 수행된다. 뉴욕이나 파리, 바르셀로나와 같은 선진국의 매력적인 도시에서는 '습격을 감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스테레오타입으로 분류되기보다는 노바디가 되어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 한다.

 

반면 '여기 사시나 봐요?'같은 말이 별로 달갑지 않은 나라와 도시도 있다.

그때는 여행자로서 현지인과 적극적으로 구별 짓고자 한다. 마치 식민지 인도에 부임했던 대영제국의 관리들이 찌는 듯한 폭염에도 셔츠의 단추를 풀지 않고 긴소매의 재킷을 고집했던 것처럼 여행자의 표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여행자는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 나라와 도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그 도시의 정주민들이 여행자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방식을 적극적으로 조정하고 맞춘다. 따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여행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쓰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그러면서 부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고향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여행지에서 쓰는 가면이 조금 낯설 뿐이다. (p.156-159)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179)



소설과 여행의 상관관계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인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는 일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배제하면서 쓰인다. 독자들은 일종의 실험실적 환경에서

인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것을 인물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인물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지켜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가 좀 더 높은 해상도로 다가온다.


여행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집중시킨다.

우리는 한 도시의 핵심으로 돌진한다. 변두리의 단조로운 주택가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겪는 자잘하고 어지러운 일상을 잠깐 맛볼 수는 있지만 오래 지속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여행자는 도시의 정수만을 원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살핀다. 현지인들은 심드렁하게 지나치는 건물과 거리에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어댄다. 여행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중략)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0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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