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2022 개봉, 대한민국, 감독: 이재은, 임지선
왜 제목이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성적표의 김민영'일까?
그 단순한 질문이 의외로 머릿속에 오래 가더라.
아마도 감독은 이 영화 제목을 지을때 이 부분을 노렸던게 아닐까?
교복을 입은 여고생 셋이 기숙사에서 찍은 듯한 풋풋한 배경과 그 시절 OMR카드에 마킹하듯 새겨진 영화 제목이 나의 학창시절을 강제 소환했다.
언젠가 한번은 봐야겠다 마음을 먹었는데 개봉하고 생각보다 한참 뒤에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게 되면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기억들이 몽땅 소환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만 보자. 예나 지금이나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내게 어린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나눌 친구가 몇명이나 남아있을까?
그래도 한 명 이상은 남아 있구나. 다행이다.
사실 영화의 내용은 잔잔하고 간단하다.
스포의 우려가 있어 네이버 영화 소개 탭에 나와있는 기본적인 줄거리만 제시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삼행시 클럽을 만들어 고등학교 생활을 함께한 김민영, 유정희, 최수산나.
영원할 것 같았던 그들의 우정도 졸업과 동시에 각자의 생활을 찾아가면서 소원해진다. 다른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민영이 갑작스럽게 정희를 집으로 초대하고, 정희는 기쁜 마음으로 민영을 찾아가지만 자신의 기말고사 성적을 정정하느라 바쁜 민영에게 정희는 안중에도 없다. 서운함이 폭발한 정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희는 민영을 기다린다. 과연 민영과 정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스펙터클하고 화려한 반전이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맞아! 나도 저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었지.' 혹은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친구한테 저랬던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지점들이 곳곳에 있었다.
저 나이 대에 겪을 법한 미묘한 감정의 어긋남과 이기심, 넓지 못했던 시야와 서투른 배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열등감과 서운함. 인간관계의 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친구와의 우정이 중요했던 시절들... 여러 가지 나의 에피소드들이 떠오른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냥 그 단어 이외의 것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옛날에 좀 놀았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뭐랄까? 들끓는 끼와 욕망을 억누르고 잘 참아온 학생이었달까? 그리고 유난히도 여학생들의 무리에서 친구를 뺏고 빼앗고, 질투하고, 이간질하는 그 모든 것들에 진절머리를 내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대충 눈감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하호호 웃으며 유연하게 지내는 타입이 못 되었던 듯 하다. 차라리 나 혼자 사는게 속편하다고 생각했던 듯 나에게 피해를 주고 스트레스를 주는 친구가 있을 바에야 아무도 없는게 낫다라는 신조로 살다 보니 은근히 교우 관계가 한정적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나에게 다가오려던 친구들도 많았지만 어느정도 선을 긋고 사람을 봐가면서 곁을 내주는 약간은 어렵고 재수없는 학생이었을 것 같다. (지금 와서 추측해보건데)
수능을 보던 날. 수능 보고 돌아와 채점을 하던 그 시간들. 그 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냥 '아 망했다.' 이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점수 체크를 위해 전화에 불이 난 상황들. 뭐라 말을 하지 못해 난감해서 전화 코드를 뽑았던 것 같기도...
다음날 뉴스에 악명 높은 이해찬 세대의 첫 수능시험. 역대 수능 최고난도를 자랑하는 97년도 수능 이래 가장 어려웠던 불수능. 모의고사 점수 100점 하락폭.
하여간 말도 안되는 뉴스가 연이어 발표되고 교실은 이미 울음바다와 한숨과 일찌감치 포기한 친구들의 히스테리컬한 웃음소리로 가득한 카오스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위로하고, 그렇지만 혼란 속에 잘 본 친구들은 잘 보았고, 의외로 선전한 친구들도 있고, 나처럼 평타 친 애들은 그나마도 양반에 속했다.
그 모든 과정을 뒤로한 채 세월은 흘렀고 친구들도 각자의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대학 생활 마지막까지 우정의 끈을 이어가던 친구들과도 각자의 생활이 달라지고 지내는 환경이 달라지다보니 사고방식과 분위기가 달라지더라.
예전의 친구가 아닌 느낌.
영원한 우정은 없겠구나. 하는 기분
그 기분을 나는 정희보다 조금 더 늦게 느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자연스럽게 느꼈다.
오히려 나이가 들다보니 더 잦게, 더 많은 포인트들에서 그런 차이가 느껴지더라.
대학, 유학, 직장, 결혼, 육아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서로 다른 가지를 타고 가게 된다.
너와 나의 갭 차이가 커질 수록 그리고 몸 담은 곳의 환경이 달라질 수록 나의 언행 또한 상대에게 큰 차이로 다가갈 수 있겠고, 반대로 상대의 생각지 못한 언행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와 거리를 두게 되는 경우가 잦아진다. 이러다 내 곁의 모두와 손절하고 지내게 되는거 아닌가 싶지만 그렇다고 딱히 두렵지도 않다.
내가 문제인건가?
얼마 전 스타강사 김미경씨가 하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돈다.
너무 인간관계가 끝났다고 속상해 하지 마세요.
끝난 관계는 그저 인연이 다했을 뿐 아쉬워 하지는 마세요.
끝난 인연에 힘들어하지 말고, 좋은 인연에 더 신경 쓰세요.
정희가 민영에게 건낸 따스하고도 냉철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민영이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당시의 나는 너무도 차갑고 거칠었나? 정희처럼 했었다면 몇 명이나 내 주변에 친구가 남아있었을까?
풋풋했던 그 시절, 불안하고도 막연한 기대감에 매일 매일이 설렜던 그 10대의 마지막과 20대의 나로 잠시 나마 돌아간 것만 같아 마음 속이 봄빛으로 물드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