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로맨스, 한국, 2022년 개봉, 감독:박찬욱
드디어 헤어질 결심을 보았다.
개봉했을 당시엔 너무나도 현실에 치여 있어서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영화 속 이야기가 코미디이든 범죄스릴러든, 멜로든 다큐멘터리든 간에 영화 같지 않고, 나의 이야기 혹은 내 주변의 이야기일 것만 같아 받아들이기 버거운 부분이 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몰입을 쉽게 잘해서일까?
어릴 적부터도 영화 속 주인공이나 등장인물 속에 이입해버리거나 그 분위기에 쉽게 젖는 경향이 있었는데 나이가 드니 영화가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라 현실의 연장선이 되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평소 영화를 고를 땐 신중하다.
방학 중 정신적 여유가 있을 땐 보다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보는 편이다. 그래도 그 모든 것들을 감안하고서라도 너무너무 보고 싶은 영화는 학기 중에 보기도 한다.
나이가 듦에 따라 정신의 폭과 그릇도 커져야 할 텐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만 같아 부끄럽지만 이게 지금의 나인걸…
어찌 되었든 2022년은 '헤어질 결심'의 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핫했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서 6관왕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고, 영화 속 명대사나 탕웨이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 등을 모티브로 예능의 소재가 되거나 제목 자체가 뉴스 헤드라인이 되는 등 수많은 곳에서 ‘헤어질 결심’을 여러가지로 인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오스카 상 후보에서 탈락된 점은 매우 아쉽다.
그래도 진짜는 알아보는 법.
BTS,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게임, 파친코에 이어 우리나라의 특유의 정서와 스토리를 담은 훌륭한 문화 예술 작품들이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한류 열풍의 신화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굉장히 은유적인 표현과 영화 곳곳에 숨겨둔 장치가 많은 영화이기에 내가 나의 감상만으로 브리핑을 하기엔 역부족인 것 같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가 유튜브에서 <헤어질 결심>에 관해 리뷰한 7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 중 몇가지만 뽑아 소개한다.
이동진 평론가의 <헤어질 결심> 유튜브가 궁금하신 분은 링크를 따라가도 좋을 것 같다.
1. 안개와 드레스
이 영화는 공간적으로 전반부에는 부산 바다, 후반부에는 이포 바다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특히 후반부의 이포라는 지역적 배경은 오전에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 햇빛을 보기 힘든 도시로 설정되어 있다. 이처럼 헤어질 결심에서의 안개라는 것은 영화 속에서 펼쳐진 모든 세계를 채우고 있는 질료라고 할 수 있으며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비밀스러운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알 수 없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역의 탕웨이는 주로 원색적인 옷을 많이 입고 나온다. 특히 2부에서 서래가 입고 나오는 청록색의 드레스는 보기에 따라 파란색이기도 하고 녹색이기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끔찍한 살인 용의자이거나 품격 높은 사랑을 하는 연인이라는 서래의 양면적 측면을 보여주는 은유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2. 잠복과 데이트
'기도수'라는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두 주인공의 만남은 그의 아내인 서래를 용의 선상에 놓고 수사를 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래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해준은 관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증거를 찾기 위해 처음에는 감시의 대상으로 잠복을 하게 되지만 그녀를 계속적으로 관찰하게 되면서 잠복의 행태는 자꾸 궁금해져만 가는 그녀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상대를 바라보고 지켜주는 데이트의 속성으로 변화하게 된다. 서래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잠복이 심리적 압박보다는 나를 지켜주는 믿음직한 누군가의 시선으로 여기게 되며 잠복을 빌미로 사실상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진다.
3. 말씀과 사진
실제로도 그렇지만 극 중 서래는 중국인으로 자신의 마음을 한국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온전한 진심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순간에 서래는 통역앱을 사용한다. 중국어로 녹음한 뒤 번역된 말을 해준이 듣게 되는데 그녀의 절절한 진심을 전달해 주는 통역 앱의 목소리는 그렇게도 무미건조할 수 없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과정 속에서 이 통역앱은 두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하지만 끝내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마는 서로 다른 그들의 현재 위치와 거리를 상징하는 절묘한 장치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통역앱은 이 영화의 자잘한 유머와 위트를 끌어올리기도 한다.
통역앱이 그들의 서로 다름을 상징한다면, 사진은 그들이 서로 같은 부류임을 직감하는 상징이 된다.
시체 상태에 대해 말씀으로 해드릴까요?
아니면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여드릴까요?
이 질문에 서래는 처음에는 말씀이라고 하지만 이내 사진으로 정정한다. 사진이라고 정정하는 말을 듣게 되자 해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다. 왜냐하면 해준은 사건이 발생하고 본인이 해결해야 되는 상황 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는 스타일의 사람이며, 아무리 끔찍한 살인사건과 시신의 상태를 보아도 두 눈을 부릅뜨고 볼 수 있는 사람이기에 '사진'이라는 단어로 말미암아 해준은 끔찍한 장면을 개의치 않아 한다는 점에서 서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직감하고 기뻐한다.
이 밖에도 그 둘은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임과 소유욕이 강한 두 사람의 배우자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그들 사랑의 바탕이 된다.
4. 질곡동 사건
이 사건은 기도수 추락사건 이전부터 해준이 매달려 온 사건으로 갑자기 카메오로 박정민 배우가 나타나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결국 범인 홍산호(박정민)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보다도 더 싫어하는 감옥행을 자처하였지만 결국 다른 사건의 용의자로서 검거되기 직전 자살을 통해 자기 나람의 방식대로 사랑을 증명하며 막을 내렸다. 질곡동 사건은 언뜻 보면 헤어질 결심의 전체적인 스토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이지만 해준과 서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사건들의 큰 밑그림이 되는 어떤 복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5. 구소산과 호미산
전반부에 등장하는 구소산은 죽은 남편을 의미하는 곳이다. 서래에게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기도수를 비유하고, 후반부의 호미산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내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산으로 서래가 사랑하는 남자인 해준을 의미한다.
때문에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으로 구소산에서는 그녀가 뒤에서 몰래 접근해서 남편을 밀어서 죽이는 장면이 등장하고, 호미산에서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해준과 서래가 한밤중에 산에 올라 서래 어머니의 유골을 해준이 대신 뿌려줄 때 뒤에서 서래가 조용히 다가와 백허그를 한다. 그녀가 자신의 뒤로 다가설 때 해준은 서래가 기도수와 같이 본인도 절벽에서 밀 것이라는 생각에 각오하는 표정이 나오는데 그녀의 사랑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음에도 대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그저 그녀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남자의 사랑의 깊이를 보여준다.
호미산과 구소산에서 벌어진 일은 사랑의 언어로 사실상 극명히 대조, 대비되고 있다.
6. 미결 사건
서래를 사랑하게 된 해준은 서래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지만 그 결정적인 증거품인 <휴대폰>을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바다 깊숙이 던져버리세요
기도수 사건은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사건의 전말을 모르기 때문에 남편이 자살한 것으로 종결되었지만 증거 인멸을 도와준 형사 해준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기에 1부에서는 그녀와의 사랑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어 끝나게 되고, 이포로 전근을 가게 된다.
해준은 자신이 범인을 은폐해줬다는 사실에 참담해졌으며 그야말로 붕괴되었다. 그의 불면은 더 길고 극심해졌으며 우울증까지 겪게 되는데 이런 해준이 살고 있는 이포로 재혼한 서래가 찾아오게 되면서 2부가 시작된다.
서래와 재혼한 임호신이라는 사람이 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해준은 또 서래를 의심하게 되고, 도대체 그녀는 왜 이포에 온 것일까?에 대한 의문을 갖지만 그녀가 자신을 잊지 못해 사랑을 찾으러 왔다고 믿고 싶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루는 흥미롭고 입체적인 모티브는 바로 <미결>이다.
1부에서 자살로 종결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2부로 찾아와 자신의 범죄 증거가 담긴 휴대폰을 다시 해준에게 돌려준 서래의 행동은 해결된 구소산 사건을 다시 미결로 되돌리기 위함이다. 그녀가 이토록 자기 자신을 의심받는 세계 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불면, 미결된 사건에 대한 집착 속으로 자기 자신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영원히 미결된 사건으로 그의 기억과 생각 속에 머물고 싶은 그녀의 욕망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고도 비밀스럽게 우아하다.
이제 내 사진을 붙여놓고 잠도 자지 못한 채 계속 내 생각만 하게 될거야
두 사람의 사랑을 영원으로 봉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사랑을 'ing'하는 것 = 미결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 <헤어질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의지의 표명이지만 반대로 '헤어질 결심을 했다'라는 말 자체가 상대방과 못헤어지겠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토로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사랑의 방식을 잘 담아낸 제목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