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살듯이 죽고, 죽은 듯이 사는 법

by 야옹이


조르바는 말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살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살거나 ,
둘은 다 같은 일 아니겠소?”

이 말은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삶의 강도를 어디에 맞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흔히 “내 삶은 얼마나 남았을까”를 고민하지만,
조르바는 “지금 이 순간은 얼마나 살아 있는가”를 먼저 물었다.

현대인은 죽음을 멀리 두고 산다.
죽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기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우울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하는 대신
“나중에”라는 단어로 삶을 유예한다.

나중에 여행 가야지.
나중에 좋아하는 걸 해봐야지.
나중에 행복해져야지.

그러나 그 ‘나중’은 대개 오지 않는다.
삶을 미루는 버릇은 결국 죽음을 잊는 버릇과 다르지 않다.

조르바는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매일 의식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 강렬하게 살았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조명”이었다.

죽음을 의식할수록, 오늘의 빵이 더 소중해졌고
죽음을 기억할수록, 친구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졌다.
죽음을 떠올릴수록, 삶은 추상에서 구체가 되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 무서워져.”
“죽음 같은 말은 하지 말자.”

하지만 조르바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잊은 채 사는 걸 두려워해야지.”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절약하지 않는다.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루를 ‘할 일 목록’으로 채우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감각이, 계획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삶의 본질은 길이에 있지 않다.
강도와 밀도에 있다.

사람은 오래 살았다고 살아낸 것이 아니고,
짧았다고 덜 산 것도 아니다.

삶의 길이는 숫자가 말해주지만,
삶의 깊이는 당사자의 리듬만이 말해줄 수 있다.

조르바라면 이렇게 마무리했을 것이다.
“죽음을 잊고 사는 날은,
살아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이미 죽은 날일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추상적으로 사유할 필요는 없다.
대신 아주 조용히, 이렇게 물어보면 충분하다.
“오늘 하루는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질문 하나면 된다.
그 질문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삶을 유예하지 않는 사람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을 정확히 바라보게 해주는 거울이다.

그 거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늘의 시간을 다시 붙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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