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문웅 5시간전

뜨레베르소네(5)

5. 정희의 직업

정희는 남편을 잃은 아픔을 안고 한적한 마을로 이사를 왔고, 그녀의 진짜 직업은 화가였다. 이사를 온 후 그녀는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도시에서의 번잡한 생활을 뒤로하고, 마을에서의 한적한 나날은 그녀에게 창작에 몰두할 시간을 주었다. 비록 그녀의 삶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었지만, 정희는 밝고 평온한 겉모습을 유지했다. 마을 사람들과는 친해지기 어렵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어느 날, 정희는 새로운 그림 소재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마을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올랐고, 특히 완수와 칠수, 두 친구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농부로서 살아온 그들의 일상이 정희에게는 묘한 매력을 주었고, 그들의 모습은 화폭에 담기에 너무나도 적합해 보였다. 그래서 정희는 먼저 칠수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칠수는 정희의 제안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내한테 모델을 되 달라고? 지가 뭐 헐 줄도 모른디... 설마 다 벗고 그리는 거 아니겄쥬?"라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정희는 그런 칠수의 반응에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아니에요, 그냥 편하게 앉아 계시면 돼요. 일하다가 잠깐 쉬는 농부의 모습을 그리려고요.”


칠수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그때 완수가 다가왔다.


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왜들 그리 웃고 있능가유? 정희 씨가 칠수 모델로 한다는 소린가유? 아니, 동네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다들 내 낯짝이 더 낫다 할 건디, 왜 나헌티는 부탁을 안 허시냐 이말이여.”


정희는 한참 웃으며 두 사람의 질투어린 다툼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두 분 다 오해하셨네요. 저는 그냥 일하다가 잠깐 쉬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별거 없이 그냥 편하게 앉아 계시면 돼요.”


그 말을 듣자 칠수는 안심한 듯 말했다. “아이구, 그렇다면야 뭐... 그래도 농부하면 지에유.

 땅이 만디!” 칠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완수는 지지 않으려는 듯 말했다. “땅만 많으면 뭐혀유. 요즘 시대에 스마트팜도 모르면서. 나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동으로 물도 주고, 온도도 맞춰가며 일하니께, 이게 진짜 농사지!”


칠수는 그 말에 발끈했다. “그게 뭔 농사여! 기계가 다 하믄 농부가 뭐하겄어! 농사란 건 손으로 땀을 흘려가며 흙 냄새 맡고 해야지. 정희씨, 나가 그래도 진짜 농부 아니겄어유?”


정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죠. 그러면 두 분 다 그리는 걸로 할게요. 됐죠?”


칠수와 완수는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뭐, 그렇게 혀유...”라고 말하며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칠수는 여전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농사를 짓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고, 완수는 최신 기술로 농사일을 하는 자신이 더 나은 농부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정희에게 모델이 되기로 했다는 점에 은근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희는 그들이 떠난 뒤에도 한참을 웃었다. 두 남자의 순박한 다툼은 그녀에게 마을 생활의 매력을 느끼게 했다. 이곳에서는 작고 소소한 일이 일상 속의 큰 사건처럼 다가왔고, 그만큼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도 깊어졌다.


그녀는 캔버스를 펼치고 마을에서의 새로운 영감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산자락에서 부는 바람, 저녁 햇살에 반짝이는 벼 이삭들, 그리고 농부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새로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정희는 농부로서의 자부심을 지닌 칠수와 최신 기술을 자랑하는 완수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서로의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의 그림으로 녹여내고자 했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저녁에는 집 앞에 앉아 서로 이야기 나누는 그들의 일상을 담으려 했다.


그러나 정희에게는 이 그림 작업이 단순히 그림 그리는 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남편을 먼저 보낸 슬픔과 서울에서의 어려운 나날들을 잠시 뒤로 하고, 이곳에서의 한적한 생활 속에서 그녀는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어느 날, 그림을 그리고 있던 정희는 문득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남편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함께했던 나날들,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를 보내야 했던 그 날. 그림 속의 완수와 칠수,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마을의 풍경은 그녀에게 잊혀졌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눈물은 아픔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눈물, 그리고 이 마을에서 다시 한 번 삶을 살아가려는 다짐이었다.


그녀는 마을에서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가며, 두 남자의 농부로서의 삶과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하나로 연결해 나갔다. 정희의 집은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해질녘이면 산 너머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마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넓게 펼쳐진 논에는 아직 추수가 끝나지 않은 벼들이 가을바람에 일렁였다.


정희는 이 황금빛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그림에 담길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과의 이야기, 농부들의 삶,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시작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칠수와 완수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정희의 집에 놀러 왔고, 정희는 그들을 모델로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완성과 칠수는 종종 정희가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완수는 “이거 뭐 완전 명화가 탄생하는 거 아니여?”라며 농담을 던졌고, 칠수는 “정희씨가 그려주믄 명화지 명화!”라고 거들었다.


정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을에서의 삶은 여전히 어렵고, 소문과 수군거림은 가끔 그녀를 괴롭게 했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하며 조금씩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뜨레베르소네(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