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2024년 12월 3일 저녁 - 술집
여의도의 한 오래된 술집. 오랜만에 모인 세 명의 전직 기자들이 탁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술집은 아늑하고,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그들의 기억을 자극한다. 테이블 위에는 술병과 안주들이 놓여 있다.
권혁진
(잔을 기울이며, 미소를 지으며)
“하, 이렇게 모인 거 정말 오랜만이다. 그때 우리가 다들 바쁘게 뛰어다니며 뉴스 쫓고, 사실들을 파헤쳤을 때가 있었지.”
박진수
(살짝 웃으며)
“그랬지. 진짜 매일이 전쟁 같았어. 사실은, 내가 생각해도 그때 그렇게 살아온 게 나름 즐거웠던 것 같아. 당시에 우리는 뭐랄까,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거였잖아.”
현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며)
“응. 그때는 진짜, 정말, 우리가 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아. 매일같이 ‘변화를 위해서’란 말로 뭉쳐서 싸웠던... 그런 거, 기억나?”
권혁진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지. ‘진실을 밝히자’고, ‘권력을 감시하자’고 외쳤던 그때. 그게 다 뭔가 의미 있다고 믿었어. 그때 정말 열정적이었잖아, 우리가.”
박진수
(눈을 감고, 술잔을 들며)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열정은 어디로 갔고, 우리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우리가 바꾸려 했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 아니 더 나아진 게 없어.”
현태
(술을 마시며, 미소 짓기)
“세상이 뭐가 나아졌냐? 적어도 우리끼리 바라는 그런 세상은 아예 존재하지 않잖아. 그때 우리가 다들 믿었던, 그 이상적인 미래는 결국 다 그냥 꿈이었던 거지.”
권혁진
(쓴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지. 우리가 한창 뛰어다니던 2000년대 초반, 그때만 해도 세상에 대한 불만이 크고, 개선할 부분이 많았다고 느꼈어. 진짜로 그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박진수
(짧은 숨을 내쉬며)
“우리는... 그때 진짜 힘이 있었잖아. 우리가 싸우면 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었지. 근데, 결국 다 사라졌지. 우리가 그렇게 뛰어다니던 시간들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이제 와서, 우린 이런 곳에서 앉아서 ‘그때’를 회상하는 거지.”
현태
(머리를 기울이며)
“맞아. 그때는 우리가 '사람들을 깨우겠다'라고, '진실을 밝혀내겠다'라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잖아. 그런데 그게 뭐였지? 지금 보면 다 그냥... 공허한 소리 같아.”
권혁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래. 나도 그때가 되게 멋있게 느껴졌던 거 알아. 우리가 다 한 팀이었고, 뉴스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 목표 하나로 다 같이 뛰었잖아. 근데 현실은 달랐어. 우리가 바꾸려던 건 그저 쌓여만 갔고, 결국엔 우리도 세상에 휩쓸리고 말았지.”
박진수
(목소리가 낮아지며)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어. 그때 우리가 그렇게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 길이 정말 나은 길이었을까? 진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오히려 우리가 뭘 놓친 거 아닐까?”
현태
(잔을 다시 채우며)
“그건... 어쩌면, 세상이 바뀐 게 아니라 우리가 바뀌었을 수도 있어. 나도 1년 동안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그동안 한 번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 나도 이제 이 길이 더 이상 나아질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
권혁진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이쪽으로 오게 된 이유가... 한동안 뉴스에 실릴 기회가 없어서였어. 다들 그렇게 떠나고, 그냥 이 길이 더 이상 내가 할 일이라고 느껴졌지. 오히려 그때 우리가 그렇게 싸웠던 것들이 이제는... 뭔가 다른 거 같아.”
박진수
(고민하는 듯한 표정)
“세상은 변하지 않았어. 우리가 바꾸려고 했던 부분은 그대로야. 그렇게 1년이, 2년이, 10년이 흘렀는데... 결국 아무것도 안 바뀌었다는 거지.”
현태
(부드럽게 말하며)
“그게 우리가 느끼는 진짜 허무함인 거지. 우리가 했던 것들이 다 의미가 없었던 거처럼 느껴져. 지금도 이렇게 술을 마시며, 그때의 얘기를 꺼내는 거 보면, 결국 세상은 우리가 원했던 방향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거 아니겠어?”
권혁진
(잔을 비우며)
“그래. 우리가 원했던 세상이 없었다면, 우리가 목표했던 세상도 존재하지 않았겠지. 우리가 그때 했던 열정은 다 어디로 갔나 싶어.”
박진수
(술을 한 모금 마시고)
“그때 그 젊음, 그 열정, 그 힘. 우리가 그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싸우기만 했던 거였나 싶어. 그게 다 그냥 남은 흔적일 뿐인 것 같아.”
현태
(차가운 목소리로)
“그때의 우리가, 지금의 이 상황을 보면 허무해. 정말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그런데 결과는 어때? 그냥 내일은 또 똑같은 일들이 반복될 거야.”
세 사람은 잔을 비우고, 조용히 다시 술을 따르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생각에 잠긴다. 그들의 표정은 점점 더 무겁고, 씁쓸하다. 지금까지의 삶과 경험이 그들에게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 그런 질문들이 떠오른다.
#장면 2
술을 마시며 TV 뉴스가 전해지다
술집은 여전히 저녁의 따스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온화한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가게 안은, 하루의 긴 일정을 마친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잠시 벗어나 술을 즐기고 있었다. 술집 구석에서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박진수, 진수, 그리고 권혁진. 그들은 과거의 일들을 회상하며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종류의 술병과 안주들이 놓여 있었다. 두툼한 마른안주와 쌈장이 따로 놓인 생선회, 새콤한 김치와 볶음밥, 술잔의 둥근 윤곽이 그들의 표정만큼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각자 다르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그들의 지난 삶을 돌아보고 있었다. 박진수는 천천히 술을 마시며 옛날생각을 떠올렸다.
박진수
(잔을 기울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래, 우리가 그때 그랬지. 변화를 꿈꾸면서도, 결국엔 나이가 들고 현실에 적응하게 되더라고. 우리가 떠올린 꿈은 점점 흐려지고, 이젠 그런 꿈들이 미화된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지금 하는 일도, 그때처럼 세상 바꾸는 일은 아니잖아. 그때는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저 살아가는 거지. 나름대로. 나름대로 살려고 하는 거지."
현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맞아. 더 이상 변화를 추구한다고 느껴지지 않기도 해.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나아가지 않으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일도 그냥... 그저 나름대로 살아가는 거지. 뭔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해. 결국엔 우리가 그때 했던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거였던 걸까? 이 나이에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아."
그때, 갑자기 권혁진이 TV 화면을 주시하다가 눈이 커지며 놀라 소리친다.
권혁진
(눈이 동그레 지며, 술잔을 내려놓고 소리친다)
"뭐? 계엄령?"
박진수와 현태는 그가 갑자기 소리친 것에 놀라며 TV를 바라본다. 그들은 술잔을 든 손을 멈추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화면 속에서는 뉴스 앵커가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어졌고,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은 더욱 힘이 빠지며 멈췄다.
TV 앵커 (화면에서)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오후,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군대에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심에서는 군경의 통제가 강화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군의 투입이 이미 시작된 상황입니다. 군경은 주요 거점과 중요 시설을 확보하고 있으며, 모든 시민들에게는 즉각적인 안전 대피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어지는 상황은 들어오는대로 계속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박진수는 TV 화면을 바라보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믿기 어려운 듯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박진수
(술잔을 내려놓으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계엄령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럴 수가 있어?"
현태
(술을 마시며, 무겁게 말한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맞을지도 몰라.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 우리가 뭘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절은 다 사라진 것 같아.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던 거 보면, 결국 우리 힘으로 뭘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권혁진은 그 말을 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TV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긴급 속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사건들의 실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권혁진
(깊은 한숨을 쉬며, TV 화면을 응시하며)
"계엄령이라니...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정치적인 긴장감이 이렇게까지 폭발할 줄은 몰랐어. 이 나라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이 나라에서 살아온 것도 꽤 됐지만,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그때, 김현태가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김현태는 연륜이 있는 선배였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며 살아왔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다. 그는 다소 차분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김현태
(잔을 들며, 조용히 말한다)
"계엄령이 뭐 이상할 것도 없지.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정치적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였어. 이 나라가 언제부터 그렇게 바뀌었는지 생각해 봐. 그때 그 시절부터, 항상 이런 긴장이 감돌았잖아. 그때는 없었던 것 같지만, 세상이 변할 때마다, 꼭 이런 극단적인 상황들이 찾아오게 마련이야."
권혁진은 김현태의 말에 놀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들을 떠올리며, 김현태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정리되지는 않았다.
권혁진
(그의 말에 놀라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정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 아니야? 이 정도로 군이 나서는 건 생각도 못했어."
김현태
(조금 비웃으며)
"그게 바로 현실이지.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아. 더 이상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거야. 변화는 언제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찾아오기도 하는 거지. 예전에도 정치적 긴장감은 항상 있었다. 그때 그 시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감하지 않았나? 우리가 바로 그 현실 속에 살아왔다는 걸 이제 깨달아야 한다는 거지."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김현태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현태의 말은 예전부터 있던 경험과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권혁진과 진수는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듯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현실의 냉혹함을 실감하게 되었다.
박진수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띠며)
"우리가 한때 꿈꾸었던 세상이란 게... 그저 꿈에 불과했던 건가?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 군대가 나서게 되는 거지. 우리가 그렇게 바꾸려고 했던 세상은, 결국 더 큰 힘에 의해 휘둘리게 된 것 같아."
현태
(잔을 들며)
"계엄령... 이젠 진짜 끝이구나. 우린 이제 그때처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 때인가 봐.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하고, 꿈꾸고 했던 일들이, 이제는 그냥 지나간 일처럼 느껴져. 현실을 살아야 할 때가 온 거겠지."
세 사람은 각자 술잔을 들며, 무거운 마음으로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경찰차 사이렌 소리와 그들의 대화 속 무게가 겹쳐지며, 시간은 흐른다. 세상은 여전히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그들은 점점 더 허무함을 느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권혁진
(조용히, 비웃듯 말하며)
"세상이 진짜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지? 이제 우리는 계엄령까지 보게 되니 참...
# 장면 3
취한 채로 이동하며 마주친 국회 앞의 상황
그들이 술집을 나설 때 겨울 공기 속에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한바탕 술에 취해, 첫 번째 술집에서 나와 두 번째 술집으로 향하던 길. 거리는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국회 앞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혼잡스러웠고 시위대와 경찰들 사이에는 몸싸움도 벌어지고 있었다. 술기운이 더해진 세 명은 어딘가 공허하고 무거운 감정이 깔려 있었다. 각자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박진수
(취한 채로 비틀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내가 이렇게 늙을 줄은 몰랐어. 우리도 이제 지나간 시절의 사람이 된 거겠지. 뭐든지 지나가고, 결국은 다 사라져."
현태
(그의 말에 동조하며, 술이 지나가며 조금 더 감정적으로)
"우리가 뭐 했지, 사실? 우리가 기대했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어. 이런 거 보면, 결국 세상은 그저 돌아가는 대로 흐르는 거야. 우린 그냥 그 속에서 살았을 뿐이지."
권혁진은 어깨동무를 해며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그 말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였다.
권혁진
(술에 취한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맞아, 결국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꿈꾸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이 또 있을지 모르잖아. 아직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어?"
하지만 그들의 대화가 이내 흐지부지해지고, 세 사람은 조용히 걸으며 국회로 향했다. 그들이 걸어가던 길, 평소에는 차분한 거리였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어떤 긴장감이 감도는 듯했다. 거리 곳곳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회 앞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다.
박진수
(눈을 크게 뜨며 국회 앞 상황을 보고)
"뭐야, 이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국회의 정문 앞, 백여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군인들과 경찰에 의해 다소 긴장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있었고, 일부는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은 이를 진압하려고 하며 그 주변을 경계하며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날카롭고, 어쩐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현태
(이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지며, 속으로 중얼거리듯)
"이런 일이 또... 이젠 사람들이 이렇게라도 저항하는 거야. 한동안 잠잠했던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 돌아왔네."
세 사람은 길게 이어진 국회의 벽을 바라보며 멈췄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어딘가 중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술기운에 더해 불안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진수
(감정이 격해지며, 입술을 깨물며)
"우리가 살던 세상은 이렇게까지 왔구나.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겠지. 이게 우리나라의 미래야. 세상은 돌아가고, 사람들이 저항하며 싸워야 하는 시대가 계속될 거야."
권혁진
(무심한 듯 말하며)
"그런가? 아니면 그냥 우리가 오래 살아서 이렇게 된 거 아닐까? 세상이 변화하려면 언제나 이렇게 격렬한 순간이 필요하겠지. 결국엔 한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에 사는 모두의 갈망이 쌓여서 결국 터지게 되는 거지."
그들의 대화는 점차 조용해졌고, 그들은 길게 나가며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 자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 중 몇몇은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시위대의 입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며 함께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는 낯익은 그 노래였다.
시위대
(함께 부르는 목소리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들이 그 노래를 듣자, 모든 것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깊은 울림이 일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그들 자신이 한때 이 노래를 부르며 열정을 쏟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그들의 노래는 이곳 국회 앞에서 울려 퍼졌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사랑, 명예, 이름 없이도 세상을 위해 싸웠던 무수한 사람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 사람은 일제히 그 노래의 흐름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어느새 한 목소리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동안 그들은 그 노래 속에 담긴 깊은 뜻을 되새기며, 점차 그들의 마음을 열었다. 지나간 시간 속의 뜨거운 기억들, 그들의 싸움과 갈등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듯했다.
세 사람
(소리 없이, 하지만 깊은 감정 속에서 함께 부르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 노래가 끝날 즈음, 세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 박진수는 그 시절이 떠올랐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박진수는 화염병을 들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희미하게 학우들이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며 함께 뛰고 있었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박진수는 조금 웃었다. 그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바꾸려고 했던 뜨거운 순간이었지만, 그 열정이 결국 현실과 마주하면서 점점 잊혀갔다. 그 열정이 지금의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는 아쉬운 마음이 들어 목을 감쌌다.
그런데 그 순간,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래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그 노래가 끝날 즈음, 현태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현태
(조금 술이 취한 채로, 웃으며)
"야! 우린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세 사람은 잠시 멈칫하다가, 그때 근처에서 한 청년이 다가왔다. 청년은 한 손에 커다란 음료수를 들고 다가오며, 세 사람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청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저씨들! 지금 술 마실 때에요?"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불쾌해하며 화를 참지 못했다. 화염병을 들고 싸웠던 그때의 기억과 비교되며 그들은 자연스레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박진수
(소리 높여 불쾌감을 표현하며)
"왜! 우린 술도 못 마시냐!"
권혁진
(거칠게 손짓하며)
"우린 할 만큼 했어! 여기 있는 새끼들보다 더 많이 했어!"
그들이 말하면서도 술에 취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박진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들의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현태
(슬며시 웃으며)
"그럼, 다시 한번 사랑과 명예도를 부르며 2차 술집으로 가자고!"
박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태의 말에 동의했다. 그때 다시 그들이 겪은 그때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전혀 바뀌지 않은 세상과 그 세상에서 바꾸려 했던 그들의 열정이 겹쳐지며, 그들은 그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또다시 술을 마시며 나누었던, 그때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걷기 시작했다.
세 사람
(서로를 보며 웃으며 부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들이 부른 노래는 단순히 예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노래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쳤던 그 시절을, 그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 부른 것이다. 술집으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그들이 한때 꿈꾸었던 세상이 아직까지 그들 마음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걸어갔다.
장면 4
입법 독재와 민주주의를 논하다
조용한 바에는 부드러운 재즈풍의 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에서 앤틱 한 가구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벽면이 어우러져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태, 권혁진, 박진수, 세 명의 전직 기자는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저마다의 생각을 쏟아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술병과 안주 접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세 사람은 적당히 취기가 올라있었고, 대화는 처음의 가벼운 농담을 넘어 점점 심도 있는 논쟁으로 흐르고 있었다.
권혁진
(잔을 내려놓으며, 약간 비꼬는 어조로)
"이봐, 이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긴 할까? 입법부가 하는 꼴을 보면 민주주의는 그냥 껍데기야. 법 만드는 거야 좋은데, 그 법이 누구를 위한 건지 생각이나 하고 만드는지 모르겠어."
박진수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쉰다)
"맞아. 특히 요즘 보니까 다수당이 자기들 멋대로 하고 있잖아. 다수결이라며, 그걸로 다 끝나버리니 소수 의견은 아예 묵살돼. 이런 게 민주주의라니, 웃기지도 않아."
현태
(잔을 천천히 들며,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받는다)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말자고.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결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잖아.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균형과 견제를 만드는 게 핵심이지. 그런데 지금 그게 잘 안 되고 있다는 거지."
권혁진
(이마를 짚으며)
"견제와 균형? 그건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얘기야. 지금 현실은 다르다고. 입법부가 힘을 가지면 그게 끝이지. 행정부든 사법부든 뭐든 다 입법부 밑으로 들어가는 거야. 그런 걸 네가 뭘 견제할 수 있겠어?"
현태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히 논리를 펼친다)
"혁진아, 민주주의의 진짜 힘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그걸 작동시키는 사람들한테 있어. 입법부가 힘을 가진 건 사실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 힘을 견제할 다른 축들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거지. 예를 들어, 사법부가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면 입법부의 과도한 권력을 막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사법부조차 정치적으로 휘둘리고 있어."
박진수
(잔을 기울이며)
"그런데 결국 문제는 국민 아니야? 국민이 무관심하면 제도가 뭐든 소용없잖아. 우리가 기자일 때도 그걸 얼마나 느꼈는데. 아무리 좋은 기사를 써도, 읽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현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민주주의는 결국 국민의 참여로 완성되는 거야. 우리가 학생운동할 때 외쳤던 게 뭐였어? 독재 타도, 호헌 철폐. 그걸 외치던 우리도 있었지만, 그걸 보고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도 많았지. 결국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거야."
현태의 말이 끝나자, 박진수의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화면전환
1980년대, 거대한 시위 군중 속에서 박진수는 최루탄 연기 속을 헤치며 화염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학우들이 독재 타도를 외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연기는 자욱했고,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다.
박진수 (과거 회상 내레이션)
"그때는 정말 죽을 각오로 뛰어들었지. 독재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말이야. 그런데 정작 우리가 바랐던 민주주의가 제대로 오지 않았다는 게 씁쓸할 뿐이야."
권혁진
(현재로 돌아와, 술잔을 부딪치며)
"진수야, 그때 우리가 했던 거, 그거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우리만큼 싸운 사람들 또 있을까 싶다." 그리고 난 이미 민주화는 완성된 거라고 봐
박진수
(쓴웃음을 지으며)
"충분했나? 모르겠어. 지금 이 꼴을 보면 그땐 열심히 싸웠어도, 우리가 이긴 건지 진 건지 헷갈려."
현태
(웃으며 한 마디 던진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야. 한 번 이겼다고 끝나는 게 아니거든. 끝없이 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거야."
세 사람은 다시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바의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조용한 대화는 점점 깊어져 갔다.
현태
(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입법 독재라는 것도 결국 다수결의 산물이야.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한계인 거지. 다수결은 필요하지만, 소수의견을 묵살하면 결국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 독재가 될 뿐이야. 그래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해."
권혁진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럼 너는 지금 시스템에서 그런 견제가 가능하다고 봐? 현실적으로 말이야."
현태
(단호하게)
"가능하다고 봐.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국민의 의식이 바뀌고, 언론이 제 역할을 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어.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박진수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결국 우리가 언론에서 했던 일도 그런 거였잖아. 국민을 깨우는 일."
유진
(바에서 대화를 듣다가 한 마디 던진다)
"그래서 여러분은 아직도 세상을 바꾸고 싶으신 거군요.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요?"
세 사람은 유진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 뒤에는 각자의 고민과 생각이 묻어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훨씬 지났지만 그들은 갈 생각이 없었는지
현태가 말했다.
야 오늘 오랜만에 사우나 가서 잘까? 옛날처럼
진수가 말했다.
술 마시면 요즘은 입장도 못하네요. 뭐 알고나...
혁진이 말했다.
괜히 집사람한테 쫓겨나지 말고 택시 타고 들어가자.
진수는 술이 취해서 중얼거렸다.
진짜 운동이 사라졌어...
전부 야당이 옳은 건 아니야...
운동이 진실이
진짜가 사라졌어...
그렇게 그들의 2024년 송년회는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