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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변질

독일, 일본, 식민지 건국운동

by 이문웅

원조 민족주의와 이토 히로부미의 민족주의,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민족주의의 차이점은 상당히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먼저 피히테의 민족주의를 살펴보면, 이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정신적 공동체를 중심으로 민족을 정의했다. 그는 민족을 단순한 혈통적 개념이 아닌, 공통된 언어와 문화를 통해 형성된 정신적 연대의 결과로 보았다. 피히테는 민족의 정체성을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문화적 기초로 이해했으며, 민족 간의 구별은 정신적 연대와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민족주의는 단순히 국가적 자립과 민족의 독립성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족이 문화적, 정신적 가치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연대와 자유를 핵심으로 삼았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이고 정치적 통합의 차원에서 민족 개념을 이해했다. 이토는 일본 제국의 군사적 우위와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 개념을 사용했다. 일본의 민족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통합을 강조하며, 그 민족적 결속은 문화나 언어보다는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단결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토는 민족의 개념을 제국주의적 단결을 향한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이는 단순히 국가적 통합을 넘어서 일본 제국의 군사적 팽창과 지배를 위한 도구로 민족을 규명한 것이다. 즉, 이토의 민족주의는 혈통과 역사적 전통보다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위한 통합에 중점을 두었다.

한국에서 나타난 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 자주성과 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한민족이라는 개념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민족의 결속은 종종 단군 신화나 혈통적 연결을 중심으로 설명되었다. 민족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방어적인 측면이 강했지만,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으며 혈통적 결속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독립과 자주성을 핵심으로 삼으면서도, 때로는 단군 신화와 같은 역사적 기원을 중심으로 민족을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가 말하는 민족주의의 형성은 서양 학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 없이 일본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배우게 된 이토 히로부미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이는 피히테의 민족주의와는 매우 다른 점이다.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민족을 정신적, 문화적 공동체로 보고, 민족 간의 구별을 언어와 문화적 유산을 중심으로 정의했으며,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접한 일본의 민족주의는 천황 중심의 정치적 단결을 강조하며, 국가의 위상 강화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맞춰 민족 개념이 왜곡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접한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고, 이는 자주적이고 문화적인 민족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만약 서양 학문을 먼저 제대로 접했더라면, 독일식 민족주의, 특히 피히테의 민족주의를 더 잘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문화적 연대와 정신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인 민족주의를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일본을 통해 배우게 되었고, 그들이 배운 이토 히로부미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적이고 정치적 단결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민족 개념을 왜곡된 형태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 점은 슬픈 아이러니이며, 민족주의 본질의 왜곡을 초래한 역사적 현실이다. 민족주의의 본래적 의미는 자주성과 독립을 위한 문화적, 정신적 결속에 있었지만, 우리가 배운 민족주의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들어낸 정치적 결속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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