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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존재로 하는 말(1/2)

3.1, 3.2, 3.3

by 감각의 풍경

3.1 말의 한계와 존재의 전환


1804년, 바르바라 율리아네 폰 크뤼드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 ‘말로만’ 세상을 해석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회심 이후 침묵을 택한 것은 단순히 수도자적 고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의 위기’에서 출발한 실존적 전환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언어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귀족 출신의 살롱 여성이었고, 『Valérie』를 통해 내면의 진동을 한 글자 한 글자에 새겨 넣었던 작가였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말이 얼마나 자주 타인을 기만하고, 감정을 왜곡하며,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지를 경험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은 한때 사랑을 갈망했고, 신을 찾아 헤매었으며, 구원 없는 고백을 반복했다. 『Valérie』는 그 집합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고백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말은 머무르지 못한다. 그것은 흘러가고, 오해되고, 때론 누군가의 무기로 탈바꿈한다. 회심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삶을 택했다. 말 대신 ‘존재 그 자체’로 말하기. 이것은 단순한 형식의 전환이 아니라, 진리 전달 방식의 패러다임 전환이었다.


이 전환은 당대 유럽의 지성사와도 맞물려 있다. 계몽주의적 언어의 시대는 모든 것을 해명 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진리는 명제나 담론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크뤼드너는 그 모든 언어 체계의 외곽에서, 고통받는 존재로, 질문하는 영혼으로 살아갔다. 그녀에게 있어 신은 논증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신은 살아지는 것이었고, 존재의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그녀는 하이데거보다 백 년 앞서, 존재로서 말하기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하이데거가 “존재는 말한다(Sein spricht)”고 말했을 때, 그는 언어 안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을 말했지만, 크뤼드너는 그 반대로, 언어가 침묵으로 수렴되는 지점에서 오히려 존재가 선명해진다는 체험을 먼저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이 아니라, 침묵을 통해 존재의 결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말이 실패한 자리에 존재가 들어섰고, 이 존재는 새로운 윤리를 요청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지 않았고, 타인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변화되었다.


그녀는 존재로 말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를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로 자기 자신을 정의했다. 이것은 말이 닿지 못한 사랑, 고백이 끝내 전해지지 못한 『Valérie』의 그 자리에서, 한 존재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전환은 회심이라는 초월적 체험의 산물이었지만, 동시에 깊은 실패와 고통의 산물이었다. 말이 끝나는 자리, 그곳에서 침묵은 하나의 언어가 되었고, 침묵 속의 존재는 하나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살아 있는 기도문’이었다.


3.2 발화하지 않는 예언자: 타자와의 공명


회심 이후, 크뤼드너는 다시 사람들 앞에 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웅변하는 설득자도, 감정을 쏟아내는 작가도 아니었다. 그녀는 침묵하는 자였다. 말이 없는 자는 때로 불편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침묵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녀는 설명하지 않았다. 판단하지도 않았다. 오직 ‘존재함’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 고통의 진동을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여 다시 반사시켰다. 이는 일종의 ‘감정적 거울’이었다. 크뤼드너는 사람들 앞에 침묵으로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그녀 앞에서 자신의 가장 깊은 고통과 기쁨을 자백했다. 그녀는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요한 청취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었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 회고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잊고 지냈던 나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을 대신 견뎌주는 존재 같았다.”

크뤼드너는 타인의 상처를 분석하거나 해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함께*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말 없는 언어가 되었고, 이 언어는 어떤 이론보다 빠르고 깊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Valérie』가 고백하지 못한 사랑을 끝내 잡아내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는 이제 ‘사랑이 도달하지 못했던 자리’에 존재 그 자체로 머물렀다.


이러한 크뤼드너의 모습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여성은 대개 감정의 전달자나 도덕적 설교자의 역할에 국한되었고, 영적 권위는 남성 성직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공식 직위도 없이, 설교 한 마디 없이, 귀족이라는 신분조차 내려놓은 채, 영적 권위를 획득해 갔다.


그녀의 침묵은 ‘반(反) 담론적 권위’를 창출했다. 말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사람들과 공명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리더십의 완전히 새로운 방식—권위가 설명이나 명령이 아닌, 공명과 존재의 진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이 시기의 크뤼드너는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말로 예언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안아주었고, 그 안에서 신의 흔적을 읽었다. 예언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가리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단 한마디 말없이도, 어떤 사람의 삶에서 빛나야 할 가능성을 비춰주는 존재였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갇히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 있는가’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 방식은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는, 발화하지 않는 예언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침묵은 당대 유럽이 잊고 있었던 감각적 신앙의 재현이었다.


3.3 말 이후의 언어: 『Lettres』와 침묵의 편지들


회심 이후, 크뤼드너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글은 더 이상 자전적 고백도, 낭만적 연애의 서사도 아니었다. 『Valérie』가 감정의 고백을 통해 타자에게 닿고자 했던 실패의 기록이었다면, 『Lettres de quelques gens du monde』는 침묵 이후의 언어를 향한 첫 실천이었다.


이 편지 모음은 1804년경부터 1808년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녀는 이 글들을 유럽 전역의 군주, 지식인, 예술가, 사상가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들에는 교리도, 신학도, 이념도 없다. 대신 담담하고 조용한 문장들이 있었고, 그 문장들 너머에는 말하지 않은 고통과 기도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 글은 ‘사유의 형식이 아니라 존재의 결’을 통해 진리를 전달하려는 시도였다.


그녀는 편지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개인의 삶이나 감정을 부각하지도 않는다. 모든 문장은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혹은 신의 침묵을 재현하듯 쓰였다. 예컨대 전쟁의 광기 속에 있는 병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그들이 감당하는 공포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너의 고요가 너를 보호할 것이다”라는 식의 은유로 접근한다. 고요란 바로 그녀가 회심 후 체득한 영적 언어였고, 이 언어는 그녀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편지들이 『Valérie』와는 전혀 다른 문법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Valérie』가 구조상 ‘고백–응답–거절’이라는 삼단 논법의 고전적 패턴을 따랐다면, 『Lettres』는 ‘응시–공명–침묵’이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새로운 글쓰기, 즉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하는 글쓰기"였다.


많은 이들이 이 글들을 “메시지가 없다”고 비판했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크뤼드너의 혁명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가 되려 했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외연보다 텍스트에 깃든 존재의 방식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Lettres』는 단지 편지 모음이 아니라, 존재의 재구성된 형식이었다.


크뤼드너는 편지를 통해 유럽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에게 침묵을 권했다. 그것은 순종이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은, '타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태'이자 '자기 내부에 말을 심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편지를 통해 요청한 것은 바로 그 공간의 복원이었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의 전쟁과 종교 개혁의 여진, 계몽주의의 이성 숭배 사이에서 균열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 크뤼드너의 편지는 도발적일 만큼 비이성적이고, 비정치적이며, 비신학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그녀의 편지는 정치와 신학, 이성을 초월한 새로운 언어적 질서를 요청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Lettres』는 발화의 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침묵이 적힌 문서’였다. 그것은 『Valérie』가 고백하려 했으나 도달하지 못한 감정의 심연, 실패한 사랑의 공허를 정직하게 응시한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쓰기였다.


그리고 그 언어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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