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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존재로 하는 말(2/2)

3.4, 3.5

by 감각의 풍경

3.4 존재의 윤리: 신을 대신해 존재하기


크뤼드너의 여정은 이제 근본적인 전환점을 지난다. 더 이상 “신을 믿는다”는 고백은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넘어, 신을 대신해 존재하는 삶, 곧 ‘대리적 존재의 윤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회심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몸소 겪은 고통과 침묵, 말의 무력함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존재 방식이었다.


이 시기의 크뤼드너는 특정한 종파나 교단에 소속되지 않았다. 경건주의와의 접촉 이후 그녀는 어떤 제도적 틀에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과 낯선 자들을 향해 나아갔다. 마치 유랑하는 예언자처럼, 그녀는 뮐하우젠, 바젤, 취리히, 베른, 그리고 드레스덴, 프라하,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리 등 유럽 전역을 횡단하며 수많은 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이 만남들은 설교나 계몽의 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설득하지 않았고, 설교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함께 있음”으로 신을 증언했다.


이런 점에서 크뤼드너는 ‘존재하는 신학’을 실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신을 말하지 않고도 증명하는 법, 그것은 그녀의 침묵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고통받는 사람 앞에서 말하지 않았고, 위로하지도 않았다. 다만 함께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고, 존재로 함께 버텼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고.


이러한 삶의 방식은 깊은 윤리적 뿌리를 가진다. 현대 철학에서 레비나스가 말했던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 혹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태어남(natality)을 인정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개념을 미리 살아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크뤼드너는 누구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고유성을 그대로 견디고, 그 견딤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침묵으로 동의했고, 침묵으로 저항했으며, 침묵으로 동행했다.


그녀의 이러한 존재는 특히 여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귀족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고려할 때 더욱 의미심장하다. 19세기 초 유럽 사회에서 여성은 교회나 정치 공간에서 발화의 권리를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크뤼드너는 그런 제도적 침묵을 오히려 존재적 침묵의 힘으로 전환시켰다. 제도는 그녀에게 말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존재 그 자체를 말로 삼았다. 귀족으로서의 권위는 거부했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도약의 지점으로 삼았다.


그녀가 각국의 군주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바로 이러한 윤리의 실천적 연장선이다. 예언자의 언어로서의 편지—이들은 설득이 아닌 깨우침의 언어였다. 그리고 깨우침은 결코 설명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일어나는 무언의 사건이다. 크뤼드너는 바로 그 사건을 준비하는 ‘삶의 형식’이 되고자 했다.

신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분의 대리자임을 자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가 아닌 책임의 형태였다. 그녀는 더 많이 말하지 않았고, 더 크게 드러나지도 않았다. 대신 더 조용히, 더 넓게 존재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곧 ‘살아 있는 기도문’이 되었다.



3.5 말 없는 불꽃: 유럽을 가로지르는 침묵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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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시 길 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크뤼드너의 행로는 어떤 체제도, 종파도, 권력도 그녀를 구속할 수 없는 경로로 바뀌었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신을 전하는 사람, 즉 ‘살아 있는 예언자’로서, 말이 아닌 존재로 유럽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말 없는 불꽃이 켜졌고, 유럽은 그 불빛 아래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묵의 순례


회심 이후 크뤼드너의 삶은 ’회피’가 아닌 의식적인 ‘돌입’이었다. 그녀는 평온한 수도실에 머물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잿더미 위에, 나폴레옹 전쟁이 휩쓸고 간 유럽 대륙 위에 그녀는 발을 디뎠다. 스위스와 독일, 체코와 오스트리아,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러시아와 프랑스를 넘나드는 여정 속에서, 그녀는 정식 직함도 없이 귀족들의 응접실, 농민들의 헛간, 병사들의 야전 텐트까지 찾아다녔다.


그녀가 선택한 방식은 ’말씀’이 아니라 ’현존’이었다. 그녀는 누구를 설득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남겼다. 그녀는 말을 아꼈고, 대신 편지를 썼다. 『세상 속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res de quelques gens du monde)』은 그 시대의 사상가, 군주, 작가들에게 보낸 존재의 언어였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교리 대신 감응과 고통, 침묵의 공명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순례는 고통의 연대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신을 가까이 데려다 놓았다. 러시아의 황태자와 대화를 나누던 순간, 프랑스 혁명기의 상흔 속에 지친 여성들과의 침묵 기도회, 병사들과 나눈 말없는 동침… 이 모든 행위는 크뤼드너가 말없이 행한 ‘선포’였다. 그녀는 도그마도, 설교문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있으면 ’무언가가 깨어난다’고 느꼈다.



침묵은 어떻게 불꽃이 되는가


크뤼드너는 이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침묵은 무능의 표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이 실패했던 시대의 구원 언어였다. 그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종교 언어가 범한 폭력을 끊어냈다. 당대 유럽은 지나치게 설명했고, 설득했고, 논박했다. 신은 그 언어들 속에서 사라지고 있었고, 그 공백을 크뤼드너는 존재로 채웠다.


그녀의 침묵은 마치 불꽃처럼 조용히 타오르는 윤리였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존재의 진실.


이런 의미에서 크뤼드너의 유랑은 단순한 순례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의 회복을 요구하는 혁명이었고, 존재를 통해 말하는 신학이었다. 그녀는 신을 설명하지 않았고, 신을 흉내 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신이 거할 수 있는 자리를 인간들 사이에 만들었다.



조용한 혁명은 끝났는가?


크뤼드너는 점차 잊혀졌다.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지자, 그녀는 더 이상 초대받지 않았고, 새로운 종교 운동 속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나 크뤼드너의 존재 혁명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것은 격렬한 상징이나 제도로 남지 않았기에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시대의 감각에 균열을 냈고, 이후 도래할 신비주의적 영성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말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한 번 그녀를 만난 이들은 “삶의 방식” 자체를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말 없는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다만, 더 깊은 내면으로 번져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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