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함은 나를 지키는 가장 강한 무기

무례함에 대처하는 품위 있는 자세

by breeze lee

엘리베이터에서 평소 인사만 나누던 이웃을 만났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인데 그는 손에 든 우편물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이거, 잘못 가져왔는데… 1층 우편함에 꽂아주실래요?"


그 순간, 나는 병원에 가는 중이었고, 안경을 쓰지 않아 글씨도 흐릿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보니 나는 1층 그는 지하 2층을 눌러 놓았다.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닌데 훅 들어온 부탁에 놀랐지만

나는 몇 호인지 물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거기 쓰여 있잖아요~~."


뇌가 순간 멈추는 거 같았다.

정말 그 한마디로 뭔가가 ‘훅’ 밀려 뇌가 순간 멈추는 거 같았다.


정말, 그때 내가 이성을 잃었다면, 아마 둘 다 감정이 상하고 말았을 것이다.(지금 생각하니 드라마 속 김수미 배우님 VS 이영애 배우님 버전이 될까 갈림길에 서 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 잡고 있을 테니, 직접 꽂고 오시죠."

그는 이전의 태도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다소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지으며 키 크고 우람한 풍채를 흔들며 잰걸음으로 달려가 우편함에 꽂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왔다. 마치 선생님이 분 호루라기에 맞춰 100m 달리기를 하고 결승전에 들어와 만족한 소년처럼. 나는 조용히 버튼을 떼고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내 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무례한 말투를 무례로 되갚지 않았고, 억지 요구에 억지로 맞춰주지도 않았다.

정중하게 내가 지켜야 할 선은 지키면서 그도 기분 나쁘지 않게 윈윈정책을 쓴 것이다.


누군가는 그걸 무뚝뚝하거나 차가웠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좀 더 정중하게 말했다면 당연히 나도 우편물을 대신 꽂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이런 무례함에 얼마나 무력했는지...


대학생 때 여행에서 버스나 기차 옆에 앉은 아저씨들의 데모는 해 봤냐 던 지 정치 성향들에 대한 질문 "학생은~으로 시작하여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압도된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후 직장인 때도 친분이 없는데도 나이가 더 많고 상사라는 권위를 갖고 나의 가족호구조사나 나이, 애인유무 등을 묻는 질문에 취소실에 온 것처럼 술술 말했던 지금 보면 왜 똑똑하게 대처하지 못했나 후회되는 적이 많았다.


착하다 얌전해 보인다 참해 보인다 는 등 말을 많이 듣고 자란 k장녀도 이에 한몫한 거 같다. 이게 나의 포승줄인 줄도 모르고 그런 이미지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후 많은 자기 계발 서적을 읽으며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말고 "말씀하시는 분의 견해는 어떠신대요?"

라든지 "좀 더 친해지면 말씀드릴게요."라는 대화기술을 알게 되었고 조금만 일찍 그 방법을 쓸 걸 이불 킥할 것 같은 마음이 든 적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화내지 않으므로써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줄여 나를 잘 지켰다. 아마 머릿속에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지나갔을 수 있다. 화낸 후 앞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어색함을 어찌할지, 바른 소리 한다고 미안해할 성격이라면 이런 배짱 좋은 부탁도 안 할 분일 테지 등...

이제야 이런 상황에 조금 자신감이 생기는 거 같다. 어쩌면 정중함은 나를 지키는 가장 강한 무기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도 오늘 일을 통해 무언가 깨달은 게 있기를.

[드라마 20세기 소녀소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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