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서울에 계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자주 뵙진 못했다. 하지만 외갓집을 갈 때마다 상냥한 말투와 온화한 눈빛으로 맞아주신 두 분이 참 좋았다.
서른 즈음, 하루는 외할아버지 앞에서 짧은 바지를 입고 춤을 춘 적이 있다. 그것도 서울대병원 로비 한복판에서 말이다. 다소 엉뚱해 보였겠지만, 오랜 병원 생활에 지친 외할아버지를 웃게 해드리고 싶었다. 손녀의 늦깎이 재롱에 껄껄 웃으시던 외할아버지는 병원복 위 얇은 점퍼를 벗어 내 허리에 감싸주시며 “우리 손녀가 이렇게 멋쟁이예요.”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새끼보다 내 새끼가 낳은 새끼가 더 예쁘다.”라시며 꼭 안아주시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참 포근했다.
그에 비해 우리 친할매는 투박하고 불같았다. 아들이 넷이나 있어 더 이상 아들은 싫다시던 할매는 첫 손주가 딸이라 그렇게도 반가우셨단다. 내가 태어난 날, 진한 홍삼 엑기스 두 숟가락을 듬뿍 떠서 내 입에 넣으셨던 할매. 지금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 무서운 시어머니를 둔 햇병아리 엄마는 안 된다는 말 한마디 못 했다.
자다가 무서운 꿈을 꿔 할매를 깨울 때면 “가씨나, 일로 온나.”하며 한 팔로 날 안아주시던 품이 참 따뜻했다. 두툼한 할매 가슴에 살포시 손을 올리면 여지없이 “치아라~”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드르렁거리던 할매였다.
하루는 깊은 잠에 빠진 나를 슬며시 흔들어 깨우셨다.
“아가~~, 일나 바라. 할매가 잠이 느무 안 온다. 쏘주 한잔하자. 김이랑 묵으까?”
“할매, 내 내일 학교 가야 되그등?”
“딱! 한 잔만 묵자. 내 벌써 갖고 왔다. 자 빨리 받아라.”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할매는, 신이 나서 눈도 못 뜬 내 손에 조그만 소주잔을 쥐여 주셨다. 본인이 먹자고 했으니 너 먼저 따라준다며 이상한 배려도 서슴지 않으셨다. 다음 날 아침, 할매 입가엔 김 가루가 흐뭇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또 어느 날 밤엔 고스톱 한판 치자며 나를 흔들어 깨우시곤 했다.
“잃어주나?”
“그래~! 손녀 돈 따먹는 할매 봤나?”
져주겠다는 할매의 약속을 받아내고 벌떡 앉았다. 영화 ‘타짜’ 저리 가라 할 만큼 고스톱에 진지했던 우리는 밤이건 낮이건 앉았다 하면 4~5시간 진심으로 싸운다. 그런데 그날따라 할매의 손장난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결국 화투판을 엎어 버렸다.
“왜 자꾸 손장난하노? 할매는 내가 바보로 보이드나? 어? 잃어 준다매!”
본인이 잘못해도 항상 당당했던 할매는 그날도 오히려 더 큰소리다.
“이 가씨나가 어데서 화투판을 엎노! 내가 손장난 하는 거 봤나? 니가 봤나?”
“그래 다 봤다! 우짤래? 아까 이래이래 하데!”
“티 나드나? 와 잘 안 되노? 미안하다! 다시 한판 치자! 내는 니랑 놀 때가 그래 재밌드라.”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할매랑 고스톱을 칠 때면 나는 그럴싸하게 잃어주기도 하고 일부로 더 악다구니를 쓰며 치기도 했다. 쉽게 져 서도 안됐고, 내가 화를 내지 않아서도 안 됐다. 마치 여정이 굽이지고 험난해야 성취감이 더 커지는 것처럼 말이다.
아빠에게 야단을 맞을 땐 내 손을 끌어당겨 당신의 뒤 품에 착 감춰주셨다.
“(아빠에게) 니! 와 아 한테 지랄하노! 아가, 느그 아빠가 니를 을매나 사랑하는데 니 버릇 나빠질까 봐 그카는기데이, 니도 알제?”
할매의 말 속엔, 야단치는 어른도, 품어주는 어른도 결국엔 나를 향한 사랑이 녹아있었다. 나무껍질 같은 거친 손바닥에 행여 내 얼굴이 아플까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닦아주시던 할매는 언제나 든든한 나의 방패였다.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대문니가 커서 ‘토끼’라는 별명을 가졌던 나에게 언젠가부터 하굣길마다 따라붙는 남자애 셋이 있었다.
“야! 야! 니 이빨 안 보여주면 집에 못 간다!”
신발주머니를 마구 휘둘러 쫓아내도 며칠 동안 시달렸던 그날은 결국 울음이 터져 버렸다. 눈물범벅으로 뛰어오는 내 모습 뒤로 깔깔거리는 남자애들을 본 나의 용사는 순식간에 성난 황소가 되어 빗자루를 휘두르며 뛰어가셨다. 그날 밤, 3인방의 등짝엔 불이 났고, 집집마다 쫓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할매는 현관 앞 신발 하나라도 더 발길질하고 나서야 속이 후련해졌다.
“니가 제일 소중 한기데이. 이 세상에서 니가 니를 몬 지키믄, 아무것도 몬 지키는 그라. 알아들었나?”
그리고는 어떻게 때려야 더 아픈지 밤이 늦도록 알려주고 또 알려 주셨다.
내가 아는 어른은 이랬다. 겁 많던 내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때론 친구 같기도 한, 진짜 어른인 분들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홀로 서울살이에 치여 지쳐갈 때면 나는 여지없이 사랑하는 어른들을 만나러 갔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분이셨기에. 하지만 돌아가는 길목에 들어서면, 나는 또다시 차가운 거리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지만 이겨내고 싶었고,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른들의 보금자리는 요양병원이 되었다. 점점 가늘어지는 허벅지처럼 그들은 이제, 오랫동안 저며지고 얇아진 기억만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내가 받은 사랑을 그들에게 쏟기엔 ‘내리사랑’하랴 정신없다는 핑계 한마디면 모든 것이 무마될 수 있었다. “이다음에 어른 되면 꼭 호강시켜줄게.”라는 말을 수백 번 내뱉는 동안, 나는 이미 어른인지, 그저 나이 든 여자인지 모를 사람이 되어 버렸고 여전히 호강시키기엔 거리가 먼, 이기적인 손녀로 남아있다.
날씨가 따뜻해지는 계절이 오면 “우리 꽃 한번 보러 가자”라는 말 한마디에 꽃보다 더 활짝 웃으시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는 마치 효도를 다 한 것처럼 뿌듯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제 가늘어졌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굳건한 용사다. 나도 언젠가 진짜 어른이 되어 “이 할미가 젊을 적엔 말이다.”라며 이야기하는 날, 그들에겐 조금은 낯설고, 흥미 없는 말들을 쏟아내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너희들에게 온 마음 다해 사랑을 쏟겠노라고. 내가 받은 사랑만큼, 아니 더 넓은 우주 같은 마음으로 보듬겠노라고.
가끔은, 아무리 애를 써도 발목이 걸려 곤두박질쳐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젊은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를 슬며시 불러 본다. 이제는 나와 나이 차이가 제법 좁혀진 그들과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보면 어릴 적,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한 말들도 이제는 재밌다고 재잘거릴 수 있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그들의 기억도 흩어져, 천천히 되짚어야지 기억이 날법한 희미해진 추억들이지만 “맞아, 그땐 그랬었지!”라며 한 번 더 웃게 해드리고 싶다. 그들은 내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어른’이었다. 그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면 오늘도 힘을 낼 이유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어른들이 많이 보고 싶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