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에 서울 외곽에 살고 있는 큰딸이 생후 5개월 된 아이와 함께 찾아왔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했던가. 딸은 그냥 집에 눌러앉았다. 사람들은 손주가 사랑스럽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나는 손주에 대한 애정보다 초보 엄마로서 힘들어하는 큰딸의 삶이 안쓰럽기만 하다. 불규칙한 수면 시간과 두 시간 간격으로 챙겨야 하는 식사, 수시로 칭얼거리는 손주의 뒷바라지를 그동안 혼자 감당해야 했을 딸이 애처롭다. 나는 딸을 위해서 뭘 해줄까 고민하다가 딸이 좋아하는 음식에 신경 쓰면서 살피기로 했다.
10월 5일부터 20일 간 나는 매일 반찬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양배추와 호박잎 쌈, 메추리알 졸이기, 소갈비, 부드러운 계란찜, 생선구이, 사태살과 곰국, 깻잎 참치김밥, 신 김치 국수, 돼지고기 묵은지 찌개, 전복죽, 바지락죽, 버섯죽 등. 다행히 큰딸은 ‘묵순이’란 별호답게 뭐든지 맛있게 잘 먹는다. 해준 사람이 신명 나고 보람 있고 즐겁다. 그러나 아기 없을 때는 부엌에서 음식하고 있으면 슬며시 다가와 허리 안으면서 "아빠, 내가 도와줄 거 없어?" 하고 애교를 부린다거나 "설거지는 내가 할게" 정도는 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완전 휴업이다. 심지어는 밥 먹고 후식으로 건네는 과일까지 먹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때는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저려온다.
요즘에야 당초 땡고추보다 더 맵다는 시집살이에 비해서 친정이란 존재가 많이 희석되어 정겹고 추억을 공유하는 혈육이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치 주는 사람 없고, 음식 청소, 빨래에서 완벽하게 해방되는 쉼터로 친정만 한 곳이 있을까. 더구나 어설픈 초보 엄마에게.
옥상에서 손바닥만 한 손자 옷을 널면서 바라본 가을 하늘이 참 예쁘다. 세상에 모든 딸들뿐이랴 사람에게는 누구나 친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황혼에 접어든 사내가 뜬금없이 친정 운운 하는 걸 보면 어찌할 수 없는 가을이 시름처럼 깊어 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