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헤드셋의 결자해지

딸아이의 취업선물

by 룰랄라

요즘 딴세상에 살고 있다.


딸아이가 취업 첫 월급턱으로 무언가를 사 준다는데 그닥 물욕이 없는 나는 머라도 지정해 주질 못하고 있던 차에 헤드셋을 끼고 출근하는 직원에게 힌트를 얻어 그걸 얻어 쓰고 다닌다.


덕분에 전철에서나마 책 읽던 습관을 분실하게 된 건 덤이다.


전철이 소음 구간이 심한 곳이 있어 일반 무선 이어폰으로는 소리가 안 들리는 지점들이 있어 안 보던 유튜브를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시청 삼매경에 빠진다.


오늘 아침에는 만년의 걸작이라는 ‘이기적 유전자’를 잘 해설해 주는 영상 한편을 출근길에 보게 되어 그 어렵다는 책을 한편 탐독한 기분이 든다.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하기도 한다. 참 좋은 세상이다.


길에서 헤드셋 끼고 다니면 차 경적 소리 등을 못 들어 위험하지 않나 생각하던 건 남에 대한 시선일 때뿐이다. 자기가 좋아하게 되면 다 내로남불이다.


한때 젊은이들이 남이 자기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의사표현으로 이어폰을 꽂고 있는 거라는 정보를 접한 적이 있었다.


집에 들고날 때 헤드셋을 꽂고 있으면 집에 누가 있는지 인사를 하는지 어쩌는지 신경을 끌 수 있어 좋다.


헤드셋을 사준 딸이 집에 있는지 쳐다는 보는지 옆눈으로 살피며 들어간다.


나랑 우리집의 유일한 공주는 궁합이 안 맞는 것 같다.


30살 차이나 나니 딸이 말속도도 빠르고 두뇌회전도 차이 나니 말다툼을 하게 되면 내가 그 아이의 말을 못 알아 듣는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말은 그닥 못 알아 듣지 않는데 유독 딸하고만 말을 섞게 되면 머리가 아득해지며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 듣겠고 어디가가 이상한 듯한데도 그 공백을 못 찾아 내곤 해서 아이가 사춘기 때는 궤변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20대 중반의 나이에도 또다시 그러니 취업 스트레스 때문인가 보다 하다가, 어느 날은 사랑을 노골적으로 갈구하길래 애정 결핍인가 생각하며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엄마는 딸을 위해 심장이라도 내어 줄 수 있다며 달래 보기도 했다.


이젠 취업까지 된 마당에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또 무작정 “밥 먹을래?” 한마디라도 걸면 말다툼이 되어 버리니, 이해를 하기도 구하기도 지쳐 당분간 말을 섞지 말자고 양해 아닌 양해를 구했다. 그러곤 딸아이 사주랑 내 사주를 들고 궁합을 다시 보기도 하며 내려진 결론이 우린 궁합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였다.


내가 딸과 대화만 하면 머리가 하얘진 이유는 그 내용에 있었다. 유독 인정욕구가 강한 나에게 딸의 언어들은 나에 대한 질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였다. 대화가 안되는 건 서로의 탓일 텐데도 무조건 “엄마는 말이 안 통해, 말귀를 못 알아 먹어!” 이런 식으로 힐난이 이어지니 머리가 작동을 멈추곤 한다.


예전엔 엄마들이 불쌍해 보여 그리 노골적인 공격은 차마 할 수가 없었는데, 우리 세대 엄마들은 너무 안 불쌍해 보여 요즘 아이들은 저리 무례하게 된 걸까?


세상엔 사이 좋은 모녀도 많지만 그래도 우리 모녀만 이리도 대화가 안 되는 건 아니겠지?


딸과 쇼핑도 하고 디저트도 사 먹으며 알콩달콩 데이트를 꿈꾸던 건 포기한 지 오래 되었다.


그냥 집에서 편히 밥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이면 족하겠다.


내 처방이 극단적이였는지 말을 안 섞으면 편할 것 같았는데 되레 집에 있는지 눈치를 보게 되고, 어차피 인사도 잘 안 챙기고 산 사이긴 해도 인사는 해야 되나 고민도 되곤 하는데 헤드셋이 세상 편하게 나를 해방시켜 준다.


멀어지는 과정은 다 비슷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기대하고 미련을 갖다가 포기하고 애씀을 멈추고 차단을 제안해 본다. 지치게 되니까...


제안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 한다. 더 나쁜 방향으로 가지 않기 위한 시도였으니까.


헤드셋 같은 도구가 차단을 도와 줄 때가 있다.


상대가 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상대도 원하는 바가 있고 방향이 서로 달라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땐 헤드셋으로 빠져 들어야 한다.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우연찮게 보람찬 콘텐츠를 찾게 될 수도 있다.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내가 발견한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우리는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유전자를 지키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우린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이란다.


내 유전자를 50%나 공유하는 유일 공주는 내가 지켜야 할, 퍼트려야 할 유전자를 지니고 있으니, 이제 양육도 다 끝난 마당에 곧 있으면 또 유전자를 퍼트릴 능력도 된 시기이니 고이 동거하다가 잘 보내 주면 되겠다.


엄마가 나이 들어 아이를 낳는 거보다는 딸이 낳는 것이 유전자 확산에 유리하여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게 되는 거라는데, 나는 그 정도로 후대 유전자까지 챙길 깜냥은 못 될 듯하다.


우리 둘은 티키타카가 되는 사이가 아닌 거다. 오히려 그냥 둘다 비슷한 유전자라 서로 시시비비만 따지며 따스하게 품는 성향이 못 되는지 상대를 피곤하다 느끼게 하는 패턴이 이미 고착되어 버렸다. 이런게 사주궁합에 풀어 나오는 게지.


세상 외로운데 애써 힘들게 양육한 딸아이와 친구 같은 사이가 되지 못하니 참 많이 아쉽다.


그래도 포기할 건 포기하는 게 맞다. 그래서 대신 딸아이가 친구하라며 헤드셋을 선물하게 되었다 보다.


스마트폰하고 친구하며 요즘 다들 혼자 잘 노는 세상이 되었다니 그 세상에 합류해 보자꾸나.


이런 걸 ‘결자해지’라고 해도 될런지, 딸아이가 우짯든 해결해 주었네. 우리도

어느날은 헤드셋 없는 자유로움을 알 수도 있겠지?


“고맙다 딸, 내가 양육하는 동안 느끼게 해 주었던 많은 행복한 시간들, 너의 유전자의 작동에 따라 생산하게 될 너의 아이들과 기쁨의 순간들을 누리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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