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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과 자본주의...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2023년 3월 22일 수요일

by 행크

1997 년 3월에 취업 대신 박사 진학을 선택하면서 사회 진출을 4, 5년 유보하게 되었는데, 그 선택은 그 시기의 특별함-전혀 좋지 않은 의미로-때문에 내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박사 과정 입학 후 1 년 만인 1997 년 12월, 우리나라에 IMF 구제 금융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 사태’라고 써놓고 보니 전문 용어 탓에 그 의미가 바로 와닿지 않는데, 쉽게 말해 나라가 부도났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인 면에서 완전히 망했다는 뜻이다. 나는 천만다행으로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학생으로 머물러 있었고 심지어 과사무실의 선생님 몇 분과도 잘 지내온 덕에 주인 없는 외부 장학금까지 받고 있던 터라 IMF 사태의 폭풍을 거의 완전하게 비켜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심각성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1998 년 여름까지는 말이다.


산 중턱에 위치한 탓에 겨울에는 무지하게 추우면서, 또한 산 중턱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름엔 하나도 시원하지 않은 학교의 8월 어느 날이었다. 연구실에서 나와 학생회관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길 옆의 벤치에 지금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대학 입학 직후부터 친하게 지냈던 H가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이 친구는 석사를 마치고 작년에 대전에 있는 한 회사에 들어가서 잘 지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친구였다. 우선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나를 알아본 H의 첫마디는 정말 예상 밖이었다.

“야, 나 회사에서 짤렸다.”

몇 초간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가, 그다음엔 얘가 농담하는 건가 다시 생각했다가, 친구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무슨 일이 났구나 싶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대사를 IMF 사태와 연결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IMF 때문에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시작했는데, 내가 일 순위더라.”

학생회관에 가던 일은 머릿속에서 휙 날아가 버렸고,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H의 부서에서 정리 해고의 기준을 정했는데 ‘부양가족이 없는 사람’, ‘젊은 사람’, ‘학력이 좋은 사람’들이 우선순위였고, H는 그 모든 것에 만족하는 일순위를 넘어 영순위의 정리 해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온정이 흐르는 것을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기업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좀 어이가 없는 정리 해고의 기준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야, 너 뭐 잘못한 건 아니고?”

“차라리 뭘 잘못해서 짤리는 거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겠는데, 팀장님이 날 부르더니 ‘H씨는 학교도 좋은데 나왔고 젊으니 쉽게 취업할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미안해하더라.”

“그럼 너 결혼식은?”

H는 그 해 11월에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그 결혼식에 사회를 보기로 해서 바로 그 걱정부터 생겼던 것이다.

“아, 몰라. 그리고 다음 달에 병특 4주 훈련도 갔다 와야 하는데 아주 미치겠다.”

그쯤까지 듣자, 듣는 내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IMF 사태의 현실은 이런 식으로 내게 다가왔다. 당시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동반 자살하는 가족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참으로 많은 가족들이 슬픈 선택을 하고 있었고 그 시절의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았지만, 매체로만 접하다 보니 마음이 정말 안타까우면서도 약간은 멀리서 일어나는 일이라 막연하게 생각해 왔는데, 나의 친구가 바로 맞닥뜨린 현실을 보면서 아주 구체적이고 절박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친구의 상황을 듣기만 해도 그 절박함이 전해져 오는데, 이 학교 울타리 밖에서는 훨씬 더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들의 마음이 어떨지는 가늠할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


일단 그날 바로, 졸업한 후 회사에서 자리 잡고 있는 선배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세 번인가 네 번째 만에 한 선배로부터 이력서 보내라는 말을 들었고, 친구는 다행히도 그 회사에 입사를 할 수 있었다. 입 맛은 쓰지만 H를 해고한 회사의 팀장의 예상이 맞은 셈이라 해야 하나? 그 후 이십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일이 잘 풀려 업계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외국계 회사로 옮겨 갔고 그곳에 연구소장까지 지낸 후, 몇 년 전부터 중국으로 파견 가서 잘 살고 있다.

하지만, 그때 아무 잘못도 없이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채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에 내던져진 많은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변해버린 세상에서도 동반 자살이 아니라 의지를 다지며 생존의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모두 안녕한지 궁금함과 염려가 함께 밀려온다.


IMF 사태가 일어난 지도 어느새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이후의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과 한국인들의 삶의 변화,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연구는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우리나라로 시작된 국가 부도 사태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메뚜기떼처럼 전 세계의 취약 국가들을 집어삼키며 가진 자는 더욱 많이 가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통제력과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자본 그 자체인 것도. 그 자본은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조금의 금가루 -그것도 가짜인- 를 나눠주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악취를 뿜어대는 괴물 같은 신을 연상시킨다.


이 글을 이렇게 IMF 사태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하게 된 것은 지난 3 년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 팬데믹 사태가 IMF 사태가 묘하게 닮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침 팬데믹 사태에 대한 분석과 의미에 대한 볼만한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IMF 사태는 주로 자본주의 시스템이 뒤처져있는 나라들을 주요 먹잇감으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선진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앞서있는 나라들- 지식인들은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체감하지 못한 탓에 제대로 된 분석이나 통찰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에 반해 스페인 독감 이후 100 년 만에 찾아온 팬데믹 사태는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 가리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선진국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는 충격이 상대적으로 더 컸던 것일까, 팬데믹 사태가 한창인 때부터 진지한 분석과 고찰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는 국가적인 혹은 전 인류적인 대재앙 앞에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리하게 파헤친다. 몇 년 사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재난 속에서 오히려 엄청난 부를 쓸어 담고 있는 집단이 있음을 폭로하고, 그 집단이 자유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지 아주 격렬하고 뜨겁게 외치고 있다. 책 속의 문장들이 어찌나 열정적이고 거친 지 종이에서 지젝의 침이 튀어나오는 것만 같다. 매우 화가 나있지만 이성이 중심을 잡고 있고, 마구 던지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예리함이 담겨 있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신도들에게 신의 말씀이 절대적인 것처럼, 자본주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본이 행하는 모든 것에 토를 달지 말고 순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지젝은 그건 자본을 신으로 섬기는 신도들인 ‘자유주의자’들의 혀놀림일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IMF 사태 때 무엇엔가 홀린 듯 금 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우리나라 사람들과 팬데믹 초기에 ‘자유’를 외치며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시위에 나섰던 프랑스 사람들이 겹쳐 보였는데, 이것이 나만의 지나친 연상 작용일까?


IMF 사태를 극복한 이후에도 그 삶이 여전히 IMF 때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팬데믹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지만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전혀 서로 상관없는 이들일까?


하이데거였던가, 어느 한 철학자가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 비꼰 말이 생각난다.

“인류가 역사에서 배운 것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국지적인 아니면 전지구적인 재앙은 언젠가 또 반복될 것이다. 당장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 한번쯤은, 아니 단 한번 만이라도 하이데거의 비아냥이 틀릴 수 있는 그런 성찰과 실천이 있기를 바라 본다. 인류가 문명을 일으킨 지 대략 일만년이 되어 가는데, 이 정도 시간이면 조금은 성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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