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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나긴 하루...밤으로의 긴 여로

2022년 8월 21일

by 행크

아침에 일어나 뭘 대단히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저녁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면 움찔 놀랄 때가 있다. 살짝 망연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를 둘러싼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느낌. 예전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면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요즘의 시간은 내가 뭘 하든, 하지 않든 자비 없이 흘러간다. 그 이유를 ChatGPT에게 물어보니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들지 않고 그동안에도 시간만 무정하게 흐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걸 지켜보아야 하는 일상에서 때로 어떤 하루는 유난히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의도치 못한 여러 일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는 ‘참 하루가 기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긴 하루가 좋지만은 않은 것이 보통 그런 날엔 달갑지 않은 일들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고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이유도 거의 그 달갑지 않은 일들 때문이다. 그런 일을 해치우면서 치솟는 스트레스와 그 뒤에 찾아오는 피로감이 채 진정되기 전에 또 다른 일이 닥쳐오면 경험적으로 ‘오늘 하루 쉽지 않네’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이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었는지 어느 작가가 분명히 자신을 겪었을 것 같은 ‘쉽지 않은 그 하루’를 문학 작품으로 남겼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작품 속의 시간은 어느 날의 아침부터 밤까지 딱 하루이다. 서양 고전극의 전통 중의 하나인 ‘하루의 시간 배경’ 속에서 한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는 작품인데, 하루동안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등장인물들의 모든 인생이 담겨있다. 4 명으로 이루어진 한 가족의 지난 시간은 비루하고 슬프고 심지어 자기 파괴적이다. 그나마 아버지는 과거 성공을 맛본 배우였지만 과거의 성공이 오히려 지금의 생활에 큰 발목을 잡고 있다. 그들의 비극은 현재인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고, 게다가 오늘은 또 하나의 비극이 더 해질 예정이다. 아버지나 둘째 아들은 별 거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오늘 더해진 비극은 이전에 한번 해체되었던 가족이 결국 다시 흩어질 것이라 말하고 있고 피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이 가족이 겪어온 삶의 불행들은 우리들 누구나 한두 가지씩은 경험해 본 것들이기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가족의 죽음, 가보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과 후회, 성공 뒤에 찾아온 몰락, 삶의 의미 상실, 마약과 알코올 중독, 당시에는 죽을 수도 있었던 심각한 병이었던 폐결핵까지.


이들이 겪는 비극이 정말 슬픈 이유는 그 누구도 악의가 없는데 비극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악의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가 명확하게 있다면 상황은 간단하다. 그 존재를 향해 분노를 터트리고 그를 제거하거나 응징한 후 그 뒤에 오는 카타르시스를 즐기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나에게 다가온 힘들었던, 때로는 비극적인 경험들을 반추해 보면 원인 제공자를 찾기 어렵고, 어렵게 원인 제공자를 찾아내더라도 나를 힘들게 할 악의나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그도 비슷하게 고통받고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주변을 끌어들이고 물들인 것뿐이다. 그렇다, 악의는 없었지만 어리석었던 것이다. 그의 어리석음이 나를, 나의 어리석음이 그를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가족도 어리석다. 자기 딴에는 잘한다고 하지만 독자나 관객 -이 작품은 희곡이다-이 보기에 그들은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그 어리석은 말과 행동이 가족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가시가 되어 다시 또 다른 가족을 공격한다. 파국을 향해 가는 이들 가족을 지켜보면서 ‘어리석고 어리석도다.’를 되뇌지만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내 안의 어리석음이 겹쳐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리석다는 걸 알지만 만약 내가 저 입장이라면 저들과는 달리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지만 그래도 서로 사랑하니까, 어쩌면 끝에 가서 작가가 자비를 베풀어 아주 조금의 희망과 애정을 이 가족에게 나누어주지 않을까 하는 유치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인 유진 오닐은 나의 유치한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작품을 끝낸다. 아주 싸늘한 시선으로 이것이 현실이고, 이것이 나의 결말이라 말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이 작품이 바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극 중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유진’이라는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가족의 총체적인 부주의로 어린 시절 병사해서 엄마의 대사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족의 씻을 수 없는 비극이 된 캐릭터에 자신의 이름을 준 것은, 이 작품에서 어느 가족-자신의 가족이기도 한-도 행복이나 마음의 평온을 갖지 못할 것이라 선언한 것이 아닐까?


서양에서는 백조가 평소에는 울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딱 한번 아름답게 울며 노래한다는 속설이 있어, 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빗대어 ‘백조의 노래’라고 부르곤 한다. 당연히 모든 예술가에게 마지막 작품은 존재하겠지만 그 작품에 ‘백조의 노래’라는 칭호를 붙여도 모자라지 않는 작품은 흔하지 않다. 유진 오닐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이야기를 백조의 노래로 택했다(자신이 죽은 후에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어떤 미화나 자기변호 없이 희곡의 형식을 빌어 차갑디 차갑게 자전적 이야기를 써 내려간 <밤으로의 긴 여로>는 여러 백조의 노래 가운데 가장 ‘뜨거운’ 백조의 노래로 남을 것 같다.


p.s. 영어 원제는 <Long Day’s Journey into Night>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이 운치는 있지만 원제목에 담겨있는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것 같아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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