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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뒷모습 2... 템페스트

2022년 7월 30일

by 행크

도서관 정원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는데 깨끗한 대기 덕에 시야가 아주 상쾌하다. 자비 없는 더위 속에서도 여름에 흔하지 않은 파란 하늘이 기분을 북돋는다.


신장 이식 수술을 한지도 어느새 일 년이 넘어섰다. 지난해 여름, 오늘처럼 덥고 맑았던 날 입원을 시작으로 한 달 병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맞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마음속에 머물다 갔다. 이미 한번 미루어졌던 수술이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수술 뒤에 내 몸은 괜찮은 걸까 같은 눈앞의 걱정부터,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내 몸의 일부처럼 따라다니는 크고 작은 마음의 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을 부유하다가 또 다른 생각과 걱정에 밀려 가라앉곤 했다. 그중에 한번 떠올라서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머릿속에 점점 크게 자리 잡기 시작한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지금 내가 인생의 전환점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몸의 크고 작은 자극과 통증을 느끼며 나의 내적이며 물리적인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동안, 동시에 외적인 주변 환경도 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한계에 도달하여 그 기능을 다한 신장과, 공교롭게도 거의 동시에 나에게 찾아온 시간의 여유, 그리고 사실상 천재지변과 다를 게 없는 코로나의 전지구적인 충격, 마지막으로 이 생각을 점점 확신으로 옮겨간 내 나이 이제 50이라는 인식. 동시에 닥쳐온 내 안과 밖의 여러 것들이 나에게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는 못할 것 -좋은 쪽으로도 그리고 안 좋은 쪽으로도-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 거의 정상인처럼 회복된 나는 무심결에 수술 이전의 삶의 방식을 다시 따라가고 있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그때 가졌던 다른 삶의 방식과 그 뒤에 따라올 인생의 마무리에 대한 생각이 항상 자리 잡게 되었다.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마주 했을 때, 아니면 그전에라도 삶의 대부분을 내려놓아야 할 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 순간을 맞을 것인가, 그리고 세상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이고 해결책이 없는 고민이다. 자신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품게 되는 질문이자 고민이지만 아무도 보편적인 답을 찾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평생을 해온 습관대로 큰 기대 없이 검색도 해보고 책도 뒤적거려 보았다. 그런데 어느 책에서 뜻 밖에 작은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노란색의 두꺼운 <교양>이라는 책에서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언급하는데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는 더 이상 희곡을 쓰지 않고 은퇴하였다는 것이다. ‘템페스트’는 이미 많이 들어본 단어이지만, 그것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이라는 것, 더욱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마침 얼마 전 국립 극장에서 보았던 연극 <햄릿>의 여운도 아직 남아 있던 지라 바로 도서관에서 빌려와 읽어보았다. 궁금했다, 당대에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그 자리를 스스로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무슨 이야기를 남겼을까?


길지 않은 이야기에 담은 셰익스피어의 메시지는 명료했다. 좀 과하게 단순화하면 셰익스피어의 인생 회고이자 은퇴 연설이라 할 수 있었다. 주인공 프로스페로의 영광과 좌절은 극작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의 한 부분이었을 거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프로스페로는 자신을 배신하고 지중해 외딴섬으로 추방한 원수들을 바로 그 섬으로 불러들여 복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지만 결국 용서와 화해를 선택하고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길을 열어주며 끝을 맺는다. 현실에서의 작가 자신도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인생의 굴곡을 겪었을 테고, 어떠한 계기로 은퇴를 결정했을 때 그 굴곡들이 하나하나 마음속에 되살아났을 것이다. 기쁨도 있었겠지만 슬픔도 있었을 것이며, 후회와 미련과 상처와 분노도 따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는 현명한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 같다. 이미 수많은 작품들에서 자신이 깨달았던 삶의 진실들을 유려한 문장으로 표현하여 독자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마지막에는 그 진실들로 자기 자신을 일깨워 혹시 남아있었을지 모를 삶의 회한과 미움, 아쉬움과 미련을 마음속에 묻어버리고 마치 프로스페로처럼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 아닐까?


난 여전히 마음속에 들끓는 크고 작은 욕망들에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고 그 욕망들과 언제 이별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도 없지만, 그저 해가 뜨고 지는 방향과 밤하늘 별을 보며 먼바다를 항해해야 했던 그 옛날 뱃사람들이 처음으로 작은 나침반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을 때 가졌을 느낌을, <템페스트>를 읽으며 어렴풋이 가져보는 경험을 하였다. 물론, 언젠가 다 내려놓아야 할 그 시간이 되었을 때 프로스페로의 길이자 셰익스피어의 길을 선택하는 현명함을 이을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어도,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이 한 선인이 갔던 길에서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울지는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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