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6일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오게 된 나는, 방학이나 명절에 집에 다녀오려면 비행기 밖에는 선택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없었다. 그 당시는 대한 항공과 갓 출범한 아시아나 항공 두 항공사만 있던 시절이라, 비행 편수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비행기 값도 상당히 비쌌는데, 30여 년 전 가격이 지금과 거의 같아서 쉽게 이용하지도 못했다.
한 번은 비행기 값이 비싸기도 하고, 사실 그것조차도 구하기 어려워서 기차와 배로 집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우선 목포까지 기차로 간 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가는 경로였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시간도 하루 종일 걸렸을 뿐 아니라, 비용도 전혀 아낄 수가 없었다. 기차와 배 값의 합은 비행기 값보다 조금 덜 했지만, 새벽부터 밤까지 이동하다 보니 사 먹게 되는 음식 값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는 집에 갈 때 이런 짓은 하지 않았다.
한편, 과 친구 중에 고향이 부산인 친구 M은 집에 내려갈 때 무조건 고속버스를 타고 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비행기는 그렇다 쳐도 막히는 일이 없는 기차가 더 나을 것 같은데, 굳이 버스를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버스는 휴게소를 들리잖아! 아마 너는 잘 모르겠지만, 고속도로 휴게소는 휴게소만의 그 맛이란 게 있거든.” M은 퉁퉁한 체형에 먹는 걸 아주 좋아하는 친구였다. 분명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10~20분의 짧은 정차 시간에 이것저것 휴게소 간식을 즐겼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하지만 휴게소의 ‘그 맛’은 간식들의 맛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세월이 지나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 가족이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려는 어느 날. 초등학교 딸아이가 나에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짐을 받는다.
“아빠, 부산까지 휴게소에 3번은 들러야 해요.”
조그만 세 손가락을 펴가며 3번 들러야 함을 강조하였고 정말 3번을 들렀는데, 식탐이 없어 집에서는 줘도 잘 안 먹던 간식거리를 아주 알차게 챙겨 먹는다. 휴게소 벤치에 앉아서 또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호두과자니 회오리 감자니 아이스크림이니 오물거리며 즐기고 있는 아이를 보면, 부산 친구 M을 떠올리며 이 아이가 즐기고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맛은 어떤 것일까 문득 궁금해했었다.
얼마 전부터 수원에 있는 한 회사의 일을 도와주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침저녁 출퇴근을 경부 고속도로로 하고 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오가는 길은 짧은 거리이지만, 수원 방향으로는 ‘만남의 광장’ 휴게소를 지날 수 있고, 서울 방향으로는 ‘죽전’ 휴게소를 지날 수 있다. 서울과 수원을 오가면서 휴게소를 이용할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두 휴게소에 있는 주유소의 기름값이 싸다 보니 한 번씩 들리게 된다. 그중에 만남의 광장은 출근길에 지나치는 곳이라 부산한 마음에 쉬이 들리지 못하지만, 퇴근 길이 지나치는 죽전 휴게소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들릴 수 있다.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죽전 휴게소는 아주 작은 휴게소이다. 작은 카페테리아식 식당과 우동/라면 가게, 편의점, 몇 개의 간식 가게가 전부인 소박한 곳인데, 아무래도 서울을 목전에 두고 있다 보니 이용객이 많지 않아 그런 것 같다. 나도 보통은 주유 때문에 들리지만 여기서 파는 라면이 제법 맛있어서 한 번씩 사 먹고는 하는데, 하루는 라면을 먹으며 창 밖 서쪽 하늘의 노을을 보다가 문득 옛 친구 M과 이제는 다 커버린 아이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잘난 척하던 M의 마음과, “휴게소 3번”을 외쳤던 아이의 마음에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에 이르러 비로소 내 마음이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집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인, 시속 100 km로 정신없이 달리다가 한 번씩 쉬어 가는 휴게소 여기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어떤 것이 있음을 그 마음의 공명을 통해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고 꼭 그곳에서만 파는 것도 아닌 고만고만한 음식을, 휴게소에 들르면 생각나고 사 먹게 되는 것은 휴게소라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일 텐데, 안 먹도 그만인 음식인데도 정말 안 먹으면, 한참을 지나치고서야 ‘좀 전 휴게소에서 먹고 올걸.’ 하는 후회가 머리를 스쳐지나가고 만다. 애초에 여행을 떠나올 때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라면을 마저 먹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결국 ‘어디를’ 가는가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든’ 가는가 가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 말이다.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은 기차역에, 버스 터미널에, 공항 출발층에 들어섰을 때이며, 고속도로 휴게소의 라면이, 비행기 기내식으로 주는 치킨 덮밥이, 기차 승무원이 밀고 다니며 팔던 카트의 삶은 달걀 -이제는 없어진- 이 유독 맛있는 것은 그동안이 어딘가를 향해 여행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다녀왔던 여행들에서 미처 느껴보지 못했던 여행의 기쁨 한 가지를, 퇴근길에 기름을 넣으러 들린 작은 휴게소에서 라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막연하게라도 그 깨달음을 20대에 얻었던, 심지어 초등 시절에 알고 있었던 옛 친구 M과 집에 있는 딸아이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라면을 깨끗이 비운 뒤, 차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죽전 휴게소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곧 서울 요금소를 통과하고 판교의 벤처 빌딩들을 양쪽으로 두고 달리다 보면, 멀리 현대, 기아 빌딩이 보이고 양재 방향 도로는 이제 앞선 차들로 가득하다. 아마도 한남대교 앞까지는 이 모양일 것이다. 그래도 퇴근하는 저녁마다 맞는 지루한 교통 체증을 오늘은 견딜 만하다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조금 전 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은 라면 한 그릇 덕은 아닐까? 지루한 퇴근길을 잠시나마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으로 감싸주어서는 아닐까? 이럴 줄 알았다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한잔 사서 출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