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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함과 악함...두편의 영화, 한 편의

2024년 8월 20일

by 행크

아무 계획이나 의도 없이 우연히 행한 일들이 있는데, 조금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미리 다 준비가 되어 있어서 마치 그것에 따라 그 일들이 일어난 것 같을 때가 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그런 느낌을 받은 일련의 일들이 있었는데, 두 편의 영화와 한 편의 책을 보고 읽은 경험이다.

시작은 이 영화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 감독은 나에게 영화 보는 고통과 영화의 감동을 함께 알려준 감독이라 할 수 있는데, <베를린 천사의 시>와 <파리, 텍사스>는 고통을 알려준 영화였고-<파리, 텍사스>는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무려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오는 영화였는데도 말이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큰 감동을 알려준 영화이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들 모두 내가 20 대였던 제법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이고, 그 이후로 그의 영화는 보지 않은 채 한동안 그의 이름을 잊고 지냈다. 그랬는데 갑자기 도쿄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 이야기를 들고 나타났다. 이전의 벤더스의 영화들과는 많이 다르게 힘을 빼고 만든 영화인데, 극영화이지만 다큐멘터리 방식을 빌려와 영화를 만들어서 그런 것도 같고, 무엇보다 일본 도쿄의 공공 화장실을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담긴 만큼 감독이 온전히 자기 스타일로 만들지 않은 것 같다.

감독 얘기는 이쯤 하고 영화 안으로 들어가면, 카메라는 도시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인 주인공의 행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주인공인 중년의 남자는 관객은 알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우여곡절을 겪은 후, 남은 인생을 낮고 조용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무엇보다 선하기 그지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고 다 받아준다. 젊은 동료 청소원이 빌린 돈을 갚지 않고 사라져 버릴 때에도, 가출한 조카아이가 갑자기 집에 쳐들어 왔을 때에도 조그만 한숨 한번 쉬고 넘어간다. 원래 그런 성격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 속의 주인공은 선량함의 좋은 표본이 되어준다. 다른 무엇보다 대도시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업 자체가 얼마나 극한 경험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겠는가.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의 구역을 부지런히 그리고 꼼꼼히 청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지 돈벌이를 위해서만이 아닌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얼마 후, 독서 모임에서 같이 읽기로 한 책이 있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

이 책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선한 쪽일 수 있다는 주장을 시종일관 펼치는 책이다.

동서양 사람들 모두 아주 옛날부터 인간의 본성의 선함과 악함에 대하여 갑론을박을 해왔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인문학 쪽이든 자연과학 쪽이든 그 어떤 합의나 증명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로 넘어오면서 주로 유럽의 백인들이 자신의 영향력을 전지구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아주 못된 짓들을 많이 했었고, 그들 자신은 짐짓 모르는 척해보기도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들을 없던 걸로 지워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못된 짓은 전 세계의 식민지 경영을 시작으로 2차 대전 동안 있었던 유태인 학살에서 최고점을 찍는데, 물질적 이익을 충분히 예상하고 진행된 식민지 경영과 달리 별다른 이익없이 그저 악의 하나만으로 치러진 유태인 학살은, 그 주범은 독일의 나치들이지만 전 유럽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무관심으로 방관했다는 면에서 그들 자신에게도 이해하기 힘든 크나큰 콤플렉스로 남아있다. 저자인 브레흐만도 유럽인-네덜란드인이다-으로서 그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없어서인지 이 책에서 유태인 학살을 중요하게 다룬다. 다만 저자는 그 지옥 속에서 인간임을 잊지 않고 헌신과 희생을 했던 어떤 이들을 조망하며, 인간의 본성에는 선함이 존재함을 강조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한 동아시아인에게는 저자가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 속 사실이나 의도적인 실험의 결과를 언급하며 인간의 선한 마음이 존재함을 강조하지만, 나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는 편인데도 저자의 주장이 심하게 부실한 것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깝기도 하고 오히려 결국 인간은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맞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걱정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책이 갖는 의의를 찾아보자면 적어도 저자는 좀 선한 사람인 것 같다는 것, 이기적이고 천박한 후기 자본주의가 세상을 휩쓸고 있는 지금 그나마 우리의 삶과 우리의 세계를 지탱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 정도이다.


계획이 없었지만 있었던 것처럼 일어난 일들의 마지막은 다시 영화이다.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

2차 대전이 끝난 지도 내년이면 80 년이다. 이 80 년 동안 사람들은 전쟁 중에 벌어졌던 유태인 학살에 대한 영화를 무수히 만들어 와서, 이젠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기어이 또 하나 만들어냈다. 바로 이 영화가 그렇다.

영화의 내용은 유태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영화 내내 유태인이 죽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다. 어느 유태인 하녀가 수용소장의 부인에게 아주 모진 잔소리를 듣긴 하지만, 그 하녀의 생명이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다만 수용소 담장 안 쪽에서 총소리, 비명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수용소의 굴뚝에서는 항상 연기가 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담장 바로 밖에 있는 수용소장의 사택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너무 평범하여 지금이 전쟁 중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영화 내내 이어지는데, 관객은 이 상황이 주는 기이함과 위화감 속에서 비로소 감독의 의도를 알게 된다. 우리가 일상에서 바라고 추구하는 것을 얻고 누리는 과정이 어쩌면 큰 악일 수도 있다는 것. 유태인 수용소와 그 옆의 수용소장 네 집의 대비같이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욕심이나 이기심 때문에 동시대 누군가는 고통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예민했던 대학 시절 이후 잊고 있었던 가슴 서늘해지는 감정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

수용소장 부인의 친정어머니가 이곳에 놀러 왔다가 처음에는 감탄하지만, 며칠을 못 견디고 딸에게 편지만 남긴 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장면이다. 친정어머니가 그 순간에 대단한 무언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직접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편지 만을 남겨둔 채 말없이 떠남으로써, 딸에게 너의 선택과 그 삶은 잘못된 것이라고 행동으로 알렸던 것이다. 그의 캐릭터는 그 시대의 인간에게 아주 조금 남아있었던, 그리고 지금이 시대의 인간에게도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양심, 그리고 선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연이지만 우연만은 아닌 것 같은 여정이 끝났다.

두 편의 영화는 좋았고 한 권의 책은 조금 아쉬웠다. 사실 이 2개의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하려는 영화는 아니다. 그저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개봉했던 것이고, 마침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본성의 선악에 대한 논쟁은 2,000 년도 더 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고, 아마 앞으로도 2,000 년은 더 다툴 수 있는 그런 주제일 텐데, 내 생각엔 과학자들이 인간의 유전자에서 선과 악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혹시 있다면- 찾아내야 이 논쟁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많이도 뜨거웠던 올해 여름에, 어쩌면 선물처럼 찾아온 이 경험은 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예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아주 조금은 성숙해진 기분이 들어 제법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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