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6일
‘여기쯤일까…?’
핸드폰에 저장해 둔 사진을 보며 위치를 찾은 다음, 자세를 고치고 딸아이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리 와서 아빠랑 같이 찍자고 했더니, 사진 찍기를 많이 싫어하는 녀석은 나를 찍어주고는 다리 저쪽으로 뒷걸음쳐 버린다. 쓴웃음 한번 짓고는 그 자리에서 몸만 오른쪽으로 돌려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유량이 풍부한 우지강이 발아래로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고, 강 옆으로 우거진 나무의 이파리들은 바람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11월 중순에도 푸르고 싱그럽기만 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우지강에 있는 아마가세 구름다리인데 그중에서도 82 년 전인 1943 년 초여름, 시인 윤동주가 발 딛고 서 있었던 그 자리였다. 2차 대전을 한창 치르고 있던 일본이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끌고 가는 것을 피해 학업을 중단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한 윤동주가 도시샤 대학의 친구들과 송별회를 하려고 찾은 곳이 우지였고, 우지강을 거슬러 오르면 나오는 이 아마가세 구름다리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 속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다리에 기대어 서서 다시 그 사진을 찬찬히 바라본다. 아주 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그날은 오늘처럼 맑은 날이었던 것 같다. 윤동주의 어깨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었고, 그림자의 길이나 방향으로 보면 한낮이었을 것이다. 송별회의 주인공이라 그런지 한가운데 서있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긴 시간의 벽을 넘어 그가 느꼈을 여러 가지 감정이 화면을 뚫고 나에게 전해진다.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와 졸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심란함, 징집을 피해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에 결국에 끌려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조국이 독립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식민지 청년의 서글픔 같은 것들이 사진 속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어쩌면, 대학 교정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로 이름도 모른 채 눈빛만 여러 번 주고받았던, 아마 다시는 보지 못할 어느 여학생의 얼굴도 잠시 떠올랐을지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 같은 한국인이 두어 명, 일본인도 서너 명 더 와서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아마가세 구름다리는 교토나 오사카에서 전철을 타고 우지역에 내린 뒤 30 ~ 40 분 정도를 걸어와야 하는데 걷는 중간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곳을 오는 사람들은 오직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일부러 오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리까지 오는 길의 초반에 뵤도인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원이 있고, 대부분의 관광객은 거기까지만 갔다가 몇 가지 기념품을 사고 다시 역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렇게 뵤도인을 지나 이 다리까지 걸어서 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같은 한국인들이야 시인 윤동주에 각별한 감정을 가진 이들이 많으니 어쩌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서 온다 쳐도, 윤동주를 알고 기억하며 아마가세 다리를 찾는 일본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온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 부녀가 아마가세 다리를 이번 교토 여행의 일정에 넣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멀리는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도시샤 대학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를 찾아갔던 일이고, 가깝게는 얼마 전 아이가 학교 수행평가로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을 선택, 조사하여 발표해야 했는데 독립 운동가로 윤동주를 고른 일 때문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던 아이가 자기 방에서 나오더니,
“아빠,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했다 할만한 자료가 별로 없는데 어떡하죠?”
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짧은 인생을 훑어보면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독립운동의 행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다 한마디 - 농담 99%와 진담 1%의 - 해주었다.
“윤동주는 외모로 독립 운동한 거 아닐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정도 얼굴에 저 정도 키면 도시샤 대학의 여학생들 다 넘어가지 않았을까? 심지어 과도 영문학과인 데다 시까지 쓴다고 했으면 윤동주를 보며 설레었던 여학생이 한 둘이 아니었을 걸.”
“그런데요?”
“그러면 그 여학생들을 좋아했던 남학생들은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니?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여럿 아프게 했으니 이게 바로 독립운동이 아니면 뭐가 독립운동이겠니, 하하하.”
“듣고 보니 그럴 듯 하긴 한데, 수행평가 자료에 그렇게 쓸 수는 없다구요.”
아이는 웃음 반, 진지함 반이 섞인 얼굴로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 후 수행평가는 잘했는지 물어보자 그럭저럭 잘 끝냈다고 하기에, 기회가 되면 자료 조사 중에 함께 보았던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속 그 장소에 가보자 얘기가 나왔고 이제 그 다리에 서게 되었다.
이 사진을 찍은 날부터 8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긴 세월 속에서 아마가세 구름다리도 1953년 태풍과 호우로 완전히 무너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다리는 그 뒤로 한참의 세월이 흐른 1996년에서야 다시 지었다고 하니, 우리가 통과해 온 그 시대, 그러니까 나와 온 인류가 견디고 지나온 그 시대가 모두에게 쉽지 않았겠구나 새삼 숙연해졌다.
아마가세 다리에서 조금 더 상류로 올라가면, 아주 최근 -2017년- 에 세워진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 비석이 있고 여기에는 <새로운 길>이라는 그의 시가 우리말과 일본말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아직 시들지 않은 꽃이 몇 송이 놓여 있던 비석 앞 벤치에 앉아 그의 시를 작게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그는 새로운 길을 아주 오랫동안 걸어가기를 바랐지만, 1945년 27 살의 나이에 그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 시기의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또 일본의 젊은이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삶의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서 권력과 가장 멀리 있는 젊은이들부터 희생되는 아이러니를 다시 한번 느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기원했다. 그래서 이 시비를 세운 사람들도 시비의 이름을 ‘기억과 화해의 비’로 짓지 않았겠는가.
늦가을이지만 아직 무성한 나뭇잎이 만든 그늘과 시원한 물소리로 청량했던 그곳을 눈과 귀에 잘 눌러 담고는, 아이에게 찻집이 나오면 따뜻한 호지차나 한잔 마시자 하며 천천히 천천히 느릿느릿 우지역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