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하는 인간...자기앞의 생

2023년 2월 26일

by 행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모는, 아니, 우리가 알아두면 좋을 모모는 두 명이 있다.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하나.

둘 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아이들인데, 오늘은 둘 중에 남자아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남자아이 모모가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제법 오래전이다, 한 십 년 전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잡식성 독서 습관 탓에 되는 대로 책을 읽다 보니, 책을 제법 읽긴 했지만 권장 도서나 추천 도서 같은 보편적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책들은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책을 읽으면서 유명하지만 읽지 않았던 고전의 내용이 인용될 때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군’ 생각이 들어 고전들을 슬금슬금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의 세계가 바다와 같은 것처럼 고전의 세계만으로도 작은 바다를 이루고 있으니, 바닷가 모래알 같은 나에게는 막막하기만 했다. 결국 이 바다에서도 평소의 독서 습관대로 그냥 마음 닿는 책을 골라 보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웬만하면 프랑스 쪽 책들은 피하려고 했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보면 프랑스 작가의 책들은 문학이건 인문학이건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따라잡기 힘들어 중간에 포기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프랑스 작가의 책을 잡게 된 것은 노래 ‘모모’ 덕이었다.


‘모모’는 1978 년에 발표된 노래인데 제목이 ‘모모’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떠올린다. 나도 처음에는 <모모>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곡이라 생각했는데, 가사를 곰곰이 곱씹어 보니 책 내용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많이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내가 아주 예전에 읽었던 <모모>에는 인간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네 없네 하는 그런 내용이 없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중학교 시절인 1980 년대부터 이 노래를 좋아해서 곧잘 흥얼거리곤 했는데 한참 어른이 된 서른 후반까지도 가사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곧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과연 내가 알고 있던 ‘모모’가 아니었다. 노래 속 ‘모모’는 미하엘 엔데의 소녀 ‘모모’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의 소년 ‘모모’였던 것이다. 아, 게으르고도 어리석은 자여.


이 책의 존재는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작가인 아자르가 프랑스 문학계를 상대로 벌였던 기행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행과 두 번이나 콩쿠르 상을 받은-콩쿠르 상은 한 작가에게 평생 단 한 번만 수여된다-작가의 작품이니 얼마나 고진감래일까 싶어 오히려 이 책에 더 손이 가지 않았는데, 그 ‘모모’가 이 책에 나오는 모모라니 호기심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서점에 가서 살펴보니 그리 두껍지도 않고 해서 결국은 사서 읽기 시작했는데, 여느 프랑스 작가의 책처럼 이 책 또한 오분의 일 정도 읽다가 더 읽기가 힘들어 그만 손에서 내려놓고 말았다. 하지만 이 책을 손에서 내려놓은 이유는 다른 프랑스 작가들의 책과는 전혀 달랐다. 이전의 프랑스 책들은 읽다 보면 작가의 이야기와 논리를 따라가지 못해 글 속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그 책에서 슬그머니 멀어졌다면, 이 책은 너무 슬펐기 때문이다.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 50 페이지 정도밖에 읽지 않았는데 벌써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은,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처음 느껴본 경험이었다. 그 정도 내용까지는 모모에게 딱히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좀 천천히 읽어야지 하고는 다른 책에 눈길을 주면서 잊어버린 척, 모르는 척 그렇게 10 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반쯤 잊은 채 지내오다 별안간 <자기 앞의 생>을 다시 붙잡게 된 것인 딸아이의 질문 때문이었다. 책장 제일 윗 칸에 엉거주춤 뉘인 채 먼지가 쌓여가던 책을 아이가 읽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다 읽고 나서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 하밀 할아버지가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다고 한 거예요, 살 수 없다고 한 거예요?”

하지만 10여 년 전에, 그것도 읽다가 만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리가. 일단 내가 다시 질문을 했다.

“책에는 뭐라고 되어있는데?”

“모모가 사랑 없이 살 수 없냐는 질문에 할아버지가 ‘예스’라고 대답하긴 했는데, 영어에서는 부정 의문문에 긍정으로 답하면 우리말과 반대로 해석해야 되잖아요. 이 책의 해석이 제대로 된 건지 모르겠어요.”

음… 이 녀석이 점점 어려운 질문을 해대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지점을 잡아낸 것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바로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에 살짝 곤혹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아빠가 한번 읽어보고 대답해 줄게.”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다.


돌아보면 지난 10 년 동안에 많은 일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좀 더 무뎌진 내가 된 걸까, 예전의 먹먹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럭저럭 빠르게 읽어나갔다. 하밀 할아버지는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한 게 맞다. 하지만 모모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책 후반부에 모모는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지는데 할아버지는 예전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뭐, 그 지점에 이르면 할아버지가 어떤 대답을 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록 비루한 삶을 살아가지만 모모와 주변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고, 이미 저승에 한 발 걸치고 있는 로자 아줌마의 남은 시간을 위해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끼어든 모모의 생부-모모의 생모를 죽이고 모모를 버렸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누구도, 아들인 모모조차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게 처량하기만 하다.


사람은 누구든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살아간다.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이 어떤 모습이든 마음대로 고를 수가 없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 뿐. 로자 아줌마처럼 전쟁과 학살의 아수라장 속에서 정신없이 오직 생존을 위한 생을 살다 간 사람도 있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끝자락에 암울한 고향을 떠나 파리의 어느 골목을 전전하는 생을 사는 하밀 할아버지와 또 많은 아프리카인들도 있다. 심지어는 모모의 생부처럼 주위 사람과 자신을 끝내 파멸시키고 마는 생을 살다 간 사람도 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열네 살 모모는 그렇게 주어지는 자기 앞의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하나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준다. 단지 자기의 생을 잘 살아낼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을 사랑했던 로자 아줌마의 생을 구원한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겨우 살아남아 젊은 시절엔 창녀로,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삶을 살아온 95 kg의 로자 아줌마가 생의 마지막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죽을 수 있도록 곁을 지키고 마침내는 죽은 이후에도 시신 곁을 떠나지 않는 모모. 바로 그가 보여주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단락에서 사람들에게 구조된 모모는 이전에 자신과 좋은 교감을 나누었던 어떤 프랑스인 부부에게 맡겨지며 지금까지의 고된 삶을 벗어나는 것으로 끝난다. 현실에서라면 모모는 여전히 그 골목을 누비며 적당히 나쁜 짓과 또 가끔 좋은 일도 하며 살아갔을 텐데,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모모에게 큰 선물을 주고 싶었나 보다.


책을 덮으면서 먼 훗날 어른이 된 모모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니스의 어느 바닷가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쩌면 그의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도 같이 서 있을 것 같다. 모모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니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디지털시대의 사랑...이터널 선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