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1일 - 계엄을 바라보며 2
내가 다녔던 학교는 처음 지을 당시에 캠퍼스 한가운데에 본부 건물과 중앙 도서관을 나란히 배치해서 지었다. 이 두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인문 계열 대학들이 자리를 잡았고, 보다 산 쪽인 오른쪽으로 자연 계열 대학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본부 건물과 도서관 사이면서 인문 대학과 자연과학대 사이에 큰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공간의 일부는 학생회관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큰 공간이 남았는데, 학교의 정중앙이라는 지정학(?)적인 이점이 더해지면서 운동권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집회를 여는 광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그곳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은 당연히 고대 아테네의 광장 이름을 따온 것이었고 보통은 줄여서 그냥 아크로라고 부르곤 했었다. 학교가 시내에 있다가 그곳으로 이사 온 이후부터 내가 학교를 다니던 90년대까지 쭉 아크로에서 집회를 열어왔는데,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학교가 산기슭에 지어진 탓에 제법 경사진 땅이었고, 중간중간에 나무도 심겨 있어 집회를 하는데 최적의 공간은 아니었다. 거기다 집회 장소로써 가장 큰 문제는 위에도 썼듯이 중앙도서관 바로 아래였다는 것이다. 아크로에서 늘 크고 작은 집회가 열렸던 것처럼, 도서관에는 늘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주로 도서관보다는 아크로에 가있는 편이었는데, 집회를 하다 보면 시끄러운 집회 소리에 참다 참다 폭발한 어느 학생이 도서관 창문을 열고 아크로를 향해 온갖 욕을 퍼붓는 일을 가끔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잠깐 집회의 진행이 멈추어지지만, 곧바로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내려와, 내려와!’, “놀다가, 놀다가!”를 단체로 외치면 욕을 하던 학생은 할 말을 잃은 채 창문을 닫고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집회는 이어졌다.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아니 다시는 오면 안 될 군사독재 시절의 황혼기 -집단의 시대와 개인의 시대가 겹쳐져 있던- 에 있었던 작은 풍경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에 더 친화적이 된 나는 이제 도서관 창문을 열어젖혔던 그 학생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아크로에 모여서 집회를 하던 학생들을 뭐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때 그들이 없었다면, 2024년 12월 3일 국회 앞에 그렇게 많은 시민들도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과 이후의 많은 날에 사람들이 국회 앞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2016년 광화문 앞을 가득 채웠던 촛불 집회가 떠오른다. 그때는 청와대가 가까웠기 때문에 광화문에 모였을 테고, 지금은 국회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국회 앞에 모이는 것이지만, 그 장소를 구별하는 것은 이제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광화문 앞이나 국회 앞이나 모두 광장이라 할 수 없는 그냥 넓은 찻길일 뿐이다. 사람들이 모여 생각을 말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마침내 생면부지의 사람들과도 유대감을 느끼는 그곳이 광장이 되는 것이다. 중앙도서관 앞, 나무도 듬성듬성한 비탈진 그곳이 아크로 “광장”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 광장의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명준이 그 사람이다. 명준은 자신이 생각하는 광장을 찾아 남과 북을 넘나들었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멀리 인도양 바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러니까 이 소설을 처음 읽게 된 건 30여 년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아크로를 지나다니던 시절이었다. <광장>은 그 당시 대학생들에게 필독 소설이었고, 나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때의 우리나라는 여전히 군인이 대통령이었고, 북한은 김일성이 북한의 수령으로 아직도 살아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가 이미 30년 전에 쓰였다니, 이 작가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일까 감탄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경연장이 되어버린 이 땅에서,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광장’을 통해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 했던 명준의 존재는 이 책이 쓰인 1960년은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처음 책을 접한 1990년대를 지나 다시 30년이 흐른 2024년인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진정한 ‘현대’ 소설은 <광장>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해방과 분단의 시기는, 분명히 세상이 바뀌었지만 끝나지 않은 구시대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새 시대를 갈망하는 명준 같은 사람들에게 정말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속에 상을 그려놓은 ‘광장’의 모습은 삼팔선 남쪽과 북쪽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돌아보면, 남쪽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기묘한 교배가 일어나고 있었고 북쪽은 그 자리에 사회주의의 탈을 쓴 교조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했으니, 그것을 예민하고 명민하게 알아차린 명준은 얼마나 암울했을까. 해방으로부터 80여 년, 이 소설의 탄생으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준을 절망에 빠뜨렸던 시대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명준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생겼다. 2016년 광화문에서의 기억과 2024년 국회 앞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주고 싶다. 그때의 분노와 그때의 결의, 그때의 희망과 그때의 자부심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돌아서면 다시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에 허덕이는 사소한 인간으로 돌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광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그리고 명준에게 물어보고 싶다. 우리가 만든 광장이 그대가 꿈꾸었던 그것과 얼마나 닮아있는지. 혹시 좀 못 미치더라도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