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도 없는 인생 Ep.6

또다시 퇴사

by 설계도 없는 인생

공황은 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L사에 입사했을 무렵,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그해 한국의 대기업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응하느라 분주했고, 각종 대형 프로젝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L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나는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프로젝트 팀은 총 세 명. 10년 차 선배 한 명, 1년 차 선배 한 명, 그리고 나.
왜 내가 이 팀에 배정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신입으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부딪히며 단단해질 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단해지기는커녕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프로젝트는 내가 입사한 지 9개월쯤 되었을 때 시작됐다.
그 9개월 동안 내가 배운 건 솔직히 거의 없었다.
해왔던 일은 대부분 잡무에 가까웠고, 실제 실무에 도움이 된 건 100중에 1 정도나 되었을까. 그러던 내가 갑자기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됐고,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과제를 맞닥뜨리게 됐다.

하루에 처리해야 할 업무가 20개라면, 내가 실제로 끝낼 수 있는 일은 고작 0.5개.
자신감은 빠르게 무너졌고, 내 쓸모에 대한 의심이 점점 나를 갉아먹었다.

당시 나의 일과는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이었다. 출근하자마자 2시간짜리 회의가 매일 있었고,
그 이후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업무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도 내가 '제대로 해냈다'라고 느낀 건 하나뿐이었다. 그 자괴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팀 분위기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10년 차 선배 조언을 구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물론 1년 차 선배는 말 그대로 본인도 정신없었지만, 10년 차 선배는… 글쎄, 정말 그렇게 바빠 보이진 않았다. 커피타임은 자주 갖고, 느긋하게 자리 비우는 모습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모습을 보며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저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 후배가 무너지고 있는데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내가 힘들었던 만큼, 나중에 누군가에게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도 내 몸과 마음은 점점 무너졌다.

퇴근 후에는 다음 날이 오는 게 두려워 잠드는 것조차 힘들었다. 겨우 잠들어도 한두 시간마다 깨기를 반복했고,
업무 중에는 한참 말하고도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했지?’ 하는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숨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 가슴을 죄는 듯한 답답함,
그리고 기억이 툭툭 끊기는 현상까지. 그건 분명 ‘공황’이었다.

그렇게 또, 나는 퇴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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