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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건우 Jul 02. 2023

인생을 달린다

서울마라톤 도전기

D-day  2023.03.19 AM 08:00

이순신장군은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고, 세종대왕은 인자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으며, 온도, 바람, 습도 거의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코로나로 인해 4년을 기다려온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숨죽인 채 총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맨 끝에 나도 서 있었다.

이 순간을 위해 혹한의 칼바람과 새벽잠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대장장이가 쇠를 연마하듯 끊임없이 단련했으며, 갖은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냈다. 그리고 저마다 목표와 사연을 안고 이 자리에 섰다.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밀면서 뛰는 부부

면사포를 쓰고 달리는 예비신부

회 접시를 들고뛰는 사장님

풀코스 1000회에 도전하시는 82세 어르신

그리고 인생 2막을 시작하려는 ‘나’


D-145 나이 50세, 달리기를 시작하다

“살아온 50년을 발판 삼아, 앞으로 50년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이제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할 나이라고” 나이 쉰을 목전에 둔 나는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태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나약했다. 정신도 육체도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좌절 그 자체였다. 벤치에 앉아 몇 번을 되뇌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그러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가족 볼 면목도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뛰었다. 그리고 나의 한계를 조금씩 높여가며 달리고 또 달렸다.


D-100  마라톤 풀코스를 결심하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 10킬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목표였다. 45일 정도를 꾸준히 달리고 나니,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20킬로 정도는 달릴 수 있었다. 하프마라톤에 도전하기로 결심하고 대회를 알아보았다. ‘서울국제마라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라톤대회이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를 희망하는 대회였다. 욕심이 생겼다. ‘잠실주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 피니쉬 라인을 두 팔 들고 들어오는’ 나를 느껴보고 싶었다. 완주메달을 깨물고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의 나약함을 극복하고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많은 고민 끝에 ‘서울국제마라톤’을 신청했다. 앞으로 100일, 이제 퇴로는 없다.


D-1  모든 준비는 끝났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달리고 달렸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뚫고 달렸다. 온갖 통증을 이겨내고 달렸다. 그렇게 100일 동안 500킬로 이상을 달렸다. 바나나 한 송이와 포카리스웨트 1.5L를 샀다. 체내에 탄수화물과 전해질을 축적하기 위해 하루 종일 먹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먹을 찰떡도 샀다. 이것은 30킬로 이후에 내 몸을 지탱해 줄 에너지가 될 것이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내 몸과 정신이 결승선까지 버텨주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할 뿐이다.


D-day  42.195km 그리고 4시간 4분 19초

드디어 결전의 날이다. 오직 나 자신만 믿고 뛰었다. 3만여 명 중에 나의 경쟁자는 ‘나’ 뿐이었고, 물리쳐야 할 적은 ‘나약함’이었다. “네 발로 기어서라도 들어간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뛰었다. 결승선에 기다리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이를 꽉 물고 뛰었다. 30킬로를 넘어서자 ‘마라톤의 벽’이 서서히 오기 시작했다. 훈련 내내 괴롭히던 왼쪽 무릎 연골과 오른쪽 허벅지 근육이 번갈아 가며 심한 통증을 안기고 있었다. “제발 잠실대교만 건너자, 그러면 기어서라도 들어간다.’’ 다시 한번 양쪽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잠실대교를 건너고 나니, 응원 인파가 엄청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며, “OOO 파이팅, 힘내라” 외쳐준다. 한 발작도 더 못 갈 것 같은데 응원에 힘입어 또 달린다. 눈앞에 잠실주경기장이 보인다. 아들 얼굴도 보인다. 이젠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어 씩씩하게 달린다. “아들아, 아빠 아직 살아있다.” 속으로 외치며 보란 듯이 달린다. 드디어 잠실주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 두 손들고 피니쉬 라인을 밟았다.

42.195km

4시간 4분 19초

해.냈.다.



마라톤만큼 정직한 운동은 없다. 자신이 달린 만큼,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운동이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데 무리를 해서 달릴 경우 꼭 대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한꺼번에 뛰는 거리를 늘려도 안되고, 속도를 높여서도 안 된다. 마라톤은 인생과도 가장 닮은 운동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고, 부단한 자리관리가 없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끝없는 인내와 한계를 극복해야 결승점에 닿을 수 있다. 욕심을 부려도 안되고, 게으름을 피워서도 안 된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내가 달려왔던 길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 달려갈 길을 비추어 주기에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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