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4가, 당신이 빛나는 순간

머물던 곳, 멈춘 순간

by 지소혜

바람 맞았다. 약속을 잊었다기보다 일부러 밀어내고 싶었는지 전화도 받지 않는다. 기다림이 지루해 약속장소에서 멀찌감치 골목을 기웃거린다. 낡은 건물 뒤편으로 새롭게 단장한 키다리 건물들이 보인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우뚝 솟은 건물처럼 범접하기 힘든 성공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그래서 곧 수익이 나지 않는 인연들은 정리 들어갈 것이다.

어렵던 시절에 만났어도 살아가는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굴곡진 하향 곡선을 그린다. 그렇다고 연락할 용기마저 없으면 힘없는 바람에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녹슨 간판이 위태롭게 달린 비어 가는 소형 건물 외벽은 더 이상 관리할 필요가 없는, 마르고 노화된 피부 같아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자꾸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등 돌려 흐느끼는 건물들을 다독이며 시선이 멈춘 순간을 담아 본다.

거래처로 가는 지름길이라 밤이고 낮이고 이곳을 지나다니면서 터가 내려진 가게를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하다. 옆 점포도 물들어가듯 인기척이 없다.


그런데 기지개를 켜며 어둠을 토해내고 눈부시게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처음 보는 조명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기대조차 없는 부질없는 약속은 깡그리 잊고 원망 섞인 볼멘소리도 쏙 들어갈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기억난다. 조명들 사이로 시선을 옮기며 나에게도 있었을 눈부신 순간을, 지금도 어디선가 볕이 들고 있겠지만 빛을 등지고 사는 움츠린 현실이 가리고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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