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이미 고물

by 지소혜

회사 숙소는 차즘 도피처가 되어갔다. 내게 주어진 작은 방 하나는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암막 커튼까지 내리고 나면 주말마다 고향집 가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여러 모임에 의무적으로 이름을 올려도 몸 상태를 핑계 대며 바깥출입을 삼갔다.


하지만 회사 근처에 거처를 마련한 것을 동료들이 알게 되자 회식 자리 참석 횟수도 늘어갔다. 전 같으면 막차 버스시간까지 배려해 주던 과장님은 무조건 끝까지 가자며 도망갈 틈을 주지 않았다. 1차 식사자리부터 반주가 곁들여져 취기가 오른 직원들은 야한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체한 음식보다 더 불편한 분위기는 식당 밖을 서성이게 했다.


회식 단골집 월 회관은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정류장 나무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2차 갈 때 즈음 다른 직원이 찾으러 온다. 아파트로 돌아갈까 하다가도 마땅한 차편이 없고 다음 날 눈총 받는 것도 부담이 되어 잠깐씩 나와 답답한 마음을 오고 가는 사람을 보며 풀었다. 거기에 앉아 있으면 인근 가게에 저녁 배달을 하고 돌아오는 명구를 만날 수 있다.


-누나!


엉킨 속을 쏟아내고파 고개 숙이고 있는 찰나에 명구가 불렀다.


-왜 나와 있어요? 누가 누나 힘들게 했어요?

-응.


짧은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앉은 명구는 씩씩거렸다. 우리 부서 남자 직원들의 이름을 꿰고 있어 내 대신 욕설을 하고 있었다. 환영 회식이 월에서 있었던 날, 20살도 안된 나는 버거운 술잔들을 받아야 했다. 환영주라고 하니 거절 하 면 첫인상에 타격을 줄 것 같았다. 겨우 입에 대기만 했는데 속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구토를 했다. 그때 명구가 내게 왔다. 좀 어린 듯 작은 키에 씨름 선수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몸이었다. 명구가 건네주는 미지근한 물 한잔으로 속을 달랠 수 있었다.


명구는 월회관의 열 세살 주방 보조였. 회식 자리에서 탈이 날 때마다 퇴근해 갈 곳 없는 명구랑 얘기를 나눴다. 식당 주인의 아들이나 친척뻘 되는 조카 정도로 생각했는데 학교도 보내지 않고 대놓고 부리는 것으로 보아 빚을 갚는 느낌이었다.


회사가 호황일 때 마을에 머무는 사람들도 덩달아 많아진다. 손바닥만 한 시내에 다방과 여관이 많았던 건 이유가 있었다. 보통 두어 달, 길게는 일 년을 머무는 사람들에게 숙소와 외로움을 달래는 이야기 장소가 필요했다. 명구는 3년 전 아비를 따라 이곳에 왔고 밥을 대어먹던 월에 외상값 대신 맡겨졌다고 했다. 자리가 잡히면 데리러 온다고 한 아비는 끝끝내 오지 않았다. 밥값 대신 일을 하지 않으면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속내가 진정되고 나서 회식 자리로 돌아왔다. 과장님은 우리 막내 속 풀어준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가락국수를 여러 개 주문했다. 명구는 날렵하게 음식들을 가져왔다. 그런데 취기가 단단히 오른 직원 중 하나가 명구를 향한 금기어를 뿜어냈다.


-학교는 왜 안다녀?

-네 아빠 언제 온대?

-너 버린 거야.


제지할 사이도 없이 이미 뱉어진 말에 명구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 같았다. 거칠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국물이 죄를 지은 직원 쪽으로 튀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릇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는데 엄지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국물 깊숙이 꽂힌 엄지는 아비를 기다리며 수없는 날을 눈물 훔친 어린 구의 자존심이었다.


엄지의 행방을 알아도 보아도 다른 음식으로 갖다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절대 버려졌다고 믿지 않는 명구에게, 월회관의 명물이 아니라 마음은 이미 고물이 되어 버린 명구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열꽃이 명구의 얼굴 여기저기에 피어났다. 숨기지 못한 마음은 눈가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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