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를 완주하는데 30분 걸린다. 시내의 시작인 삼거리 피아노 학원에서 끝인 손두부 가게까지 평발인 사람의 보폭으로 30분이면 충분하다. 길게 늘인 국수 반죽처럼 양팔 벌려 쏙 들어올 만큼 작은 거리를 나는 시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가게가 그 시내의 유일한 본점이자 지점이었다. 가게 주인들에게 눈도장 찍는 인사라도 해 두지 않으면 오만불손한 진상고객으로 소문날 수도 있다.
그나마 슈퍼 사장님은 말수가 적고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물건 사러 갈 때마다 아는 체할 필요는 없었다. 자주 들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제대로 눈 맞추고 인사를 한 기억이 없다. 좁은 공간 사이를 비집고 필요한 물건을 고를 때 사장님은 어김없이 새로 들어온 물건을 정리하신다. 보통은 카운터 앞에서 손님이 계산할 때를 기다리거나 뭐 찾으세요? 하며 물어볼 법 한데 말이다.
물건이 겹겹이 쌓인 층 아래쪽에서 사야 할 것들을 찾을 때마다 머리끝이 뻗어 뒷덜미 중심으로 향한 두상을 내 쪽에 조준하고 박스를 민다.
-좀 비켜주실래요?
-앗, 네...... 죄송해요.
하마터면 몸 중심을 잃고 박스 위에 주저앉을 뻔했다. 면상을 보이고 말하는 게 아니라 머리카락 뒤덮인 쪽만 보이니 섬뜩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슈퍼를 찾는 사람과의 의사소통보다는 들어온 물건을 정리하고 바코드를 찍으면 뜨는 계산대 화면만 바라봤다. 만물 슈퍼에서 들리는 소리는 박스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 바코드 찍을 때 나는 소리뿐이다. 숨소리도 죽여야 할 만큼 사장님의 기분을 맞춰야 하는 건지 오면 안 될 곳을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사장님과 비슷한 모습의 조금은 더 나이 드시고 초췌한 어르신이 계실 때가 있는데 차라리 틀니의 어색한 부딪힘이 느껴져도 그분이 더 나았다. 대답은 짧아도 손가락은 아주 정확히 찾는 물건을 가리켰다. 뒷짐 지고 바깥문에 나가 담배 한 모금 필 때도 주욱 뻗은 팔이 가리키는 물건의 위치는 마치 그물에 낚인 듯 내 시선과 랑데부했다.
-좀 비켜주실래요?
박스 길을 내어주고 다른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통조림류를 고르고 있는데 뒤통수 쪽에서 또 들려왔다. 앗, 순간 그 애매한 동작에서 어느 쪽으로 피할지 몰라 대답도 못하고 굳어 버렸다.
-oo회사 다니죠?
나를 알고 있었다. 문서 발송 업무를 하느라 시내 우체국에 잠깐씩 들를 때 사무실에 둘 차 종류를 몇 번 산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슈퍼 사장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박스 미는 남자, 물건 정리하는 남자,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겨우 알리는 남자만 보았다. 나는 제복 위에 회사 점퍼를 껴입어 바닷바람을 견디곤 했는데, 짙은 남색에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회사 마크를 보고 묻는 줄 알았다.
-사장님! 저 아세요?
-현장에 간식 배달 갔다가 봤어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나는 기억이 없다. 공장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수는 꽤 되어 간식도 박스채로 현장의 수장인 반장님이 직접 주문하는 것으로 안다. 사무실 건물 앞에 그 간식 박스들을 내려놓는 꽤 마른 사내가 떠올랐다. 주로 내가 외근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 들어올 때 그 사내는 등을 돌린 채, 그 누군가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박스를 내려놓곤 했다.
자주 봤던 그 사내에게 스치듯 시선이 짧게 머물렀다. 수고하세요 한 마디 정도는 자연스러웠을 텐데 그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회사 적응기를 보내는 동안 누가 이름을 물을 까 봐, 아는 체를 할까 봐, 야한 농담들을 할까 봐 두려웠다. 능숙 능란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 난감한 표정을 짓었다. 그러다 보니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하는 의사소통이 너무 부담이 되었다. 첫 말문을 트고 난 다음에는 대꾸할 말을 못 찾아 머뭇거려야 했다.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 보다도 못한 처지였다. 누군가의 길 안내 역할은 흔들림 없이 서 있으면 되지만 이른 회사 생활이 주는 어렵고 불편한 시선의 화살촉은 그냥 서 있다가는 상처가 계속 났다. 하지만 적응해 가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제가 눈이 작아요. 그래서 보이는 것만 봐요.
-예?
-그러니까, 배달 갔는데 못 보던 얼굴인데 자주 보여서요.
이상하다. 등 뒤에 눈이 있지 않고서야 늘 등지고 박스를 내리던 사장님이 나를 알아봤다는 게 신기했다. 마음에서 돋은 눈은 꼭 대상을 보며 확인하지 않나 보다. 사장님 주변 환경에 새롭게 등장한 나에게 관심을 갖고 기억해 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저 사장 아니에요. 아버지가 치매 초기라 슈퍼를 대신 지키고 있어요.
슈퍼 처마 끝 햇빛 가림막, 따가운 볕과 매서운 바람도 멈추게 할 안전한 장소에 서서 대화가 이어졌다.
더 이상 상대방의 시선에 신경 쓰며 할 말을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 유난히 작은 눈에 늘어진 엿가락처럼 마른 몸이지만 슈퍼 아저씨는 박스를 밀고 옮기면서 대화의 어색함을 견디면서도 나를 비롯해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과의 안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텄다.
회사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에는 퇴근버스가 숙소 앞까지 가는 데도 슈퍼 앞 정류장에 내린다. 물건 주문받는 전화를 받고 있는 만물 슈퍼 아저씨를 지켜보다가 코너를 몇 군데를 돈다. 딱히 살 물건이 없는 데도 물건을 만지작 거리다 문을 밀고 나가 처마 끝에 서 있으면 어느새 아저씨가 왔냐며 먼저 말을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