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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혜 Oct 02. 2022

낙서로 얼룩진 가을 점퍼

차마 입을 수 없는 옷을 버렸다. 세 살 터울 언니가 물려줄 때까지 몇 년을 기다렸고, 처음 입게 된 날 머리띠까지 깔 맞추며 등교했다. 가을 문턱이라 겨드랑이까지 쓸고 가는 바람을 막아내는 연둣빛 점퍼였다.


교실에서 점퍼는 눈에 띄었다. 수업 중에도 선생님의 시선이 자주 꽂혀 내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였다. 창가 쪽 뒤에서 두 번째 앉았는데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다가와 한 마디씩 했다.


- 너 옷 아니지?

- 산 거야?

- 너무 튄다

- 예뻐!


평소 벽의 꽃처럼 말없고 활동성이 거의 없었기에 연둣 점퍼는 파격적인 표현이긴 했다. 하지만 그 점퍼가 먹잇감이 될 줄은 몰랐다. 미술 수업시간이 한창인데 등 쪽이 간지러웠다. 강현이가 의심됐지만 돌아보지는 못했다.


그 아이는 우리 반에서 힘이 제일 세고 키도 크고 옷도 제일 잘 입었다. 옆에만 있어도 주눅 들고 지우개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은 게 수십 개지만 한 번도 따질 수가 없었다. 인기척을 내며 등을 바싹 책상 쪽으로 갖다 대자 강현이의 손놀림이 멈춘 듯했다. 그 순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무사히 모든 것이 지나가길 간절히 바랐다.


쉬는 시간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키득거렸다. 그런데도 쉽사리 점퍼를 벗지 못했다.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오기였는지, 이 기회에 강현이의 짓거리를 알리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종례시간 선생님이 학급 쓰레기통 비우는 도우미로 나를 지목하셨다. 버릴 기회를, 아니면 인적이 드문 곳에서 벗어 감출 기회를 주셨던 걸까.


학교 뒤뜰 한쪽에 반마다 나오는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버려지면 다시 못 돌아올 점퍼를 벗었다. '하지 마'라는 말도 잘 못하는 사람에게 입혀진 옷의 신세가 기구했다. 붓펜 먹물 아주 뚜렷하게 연둣빛 점퍼에 박혀 있었다.


- 바. 보.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

무너졌다.  얼마 동안 점퍼를 끌어안고 소리도 못 내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일반 쓰레기봉투 안에 점퍼를 쑤셔 넣었다. '바보'라는 글자도 같이 버려졌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켜 세우며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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