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화 캐스팅이 다? 메릴 스트립은 정말 메릴 스트립하는 영화!(스포만땅)
지난밤 우연히 <더 프롬 The Prom, 2020>이라는 뮤지컬 영화의 소개글을 보았다. 마침 시간이 비었기에 바로 넷플릭스를 켜고 <더 프롬>을 검색했다. 메릴 스트립과 니콜 키드먼이 등장하는 예고편 만으로도 <더 프롬>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과거 초호화 캐스팅이 유일한 미덕이었던 최악의 영화들(왕년의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총출동한 노익장 영화 시리즈 라든가 심지어 출연진까지 겹치는 뮤지컬 영화 <켓츠> 등이 떠올랐다)에 실망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시감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리모컨의 플레이 버튼을 눌려졌고 넷플릭스 뮤지컬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는 데 망설이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는 프롬이 고등학교 졸업 파티이며 학창 시절 가장 중요한 추억이라는 사실도, <더 프롬> 영화가 <글리 시즌 1>의 총감독인 라이언 머피가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도, 동명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영화의 원작이라는 사실도, 심지어는 이 영화가 퀴어 이슈를 다루는 내용인 것도 전혀 알지 못하고 보기 시작했지만 이 영화 <더 프롬>을 즐기기에는 그런 사실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에 대한 약간의 이해와 호감도가 있다면, 퀴어 문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면, 러닝 타임 131분은 쏜살같이 지나갈 것이다. 메릴 스트립과 니콜 키드먼이 한 영화에 나오는데 지루할 겨를이 있을 리가 있을까? (그러나, 실제로 나는 이 영화를 한 큐에 끊지 않고 보지 못했다. 나 홀로 극장의 장점 중 하나겠지만 넷플릭스는 끊었다가 다시 이어 보기가 가능하다. 다들 아시겠지만! 하하)
굳이 <맘마미아>와 <물랭루즈>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니콜 키드먼과 메릴 스트립, 그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는 표정과 몸짓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향수를 자아낸다. 첫 장면에서 "뉘슈?" 할 정도로 분을 떡칠한 메릴 스트립이나 여전히 늘씬늘씬한 몸매를 선보이지만 이제 뱀파이어가 아닌 배우 니콜 키드먼을 영접하는 것만으로 즐거워하기에 두 시간은 좀 버거웠던 것 같다.
나는 역시 금사빠였다. <더 프롬>의 예고편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기에 14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극 중 뮤지컬 <엘리노어>의 화려한 춤사위에 눈을 빼앗겼지만 곧 뮤직 비디오 같은 길거리 전개에 스팸을 먹고 근친상간을 한다며 인디애나 주 사람들을 폄하하는 가사의 노래를 들으며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이 비판하려는 대상 즉,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는 차별주의자처럼 인디애나 주 사람들을 통틀어 스팸을 먹어대는 무식한 촌뜨기 변태로 만드는 것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폭력을 근절시킨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폭력을 사용하는 폭력배를 마주친 느낌이랄까?
주인공 에마의 학교 친구들이 트렌트가 부르는 교화적인 노래 '너의 이웃을 사랑해!' 한 곡을 듣고 바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에마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든지, <스캔들>의 히로인 캐리 워싱턴이 연기한 그린 부인이 갑자기 레즈비언 딸인 알리사를 이해한다는 설정은 '전형적'인 부분을 넘어 억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에 하이틴 드라마를 엮는 <글리> 스타일도 이 영화에 복합적인 재미를 주기는커녕 물과 기름같이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뮬란>의 사례처럼 할리우드가 상업적인 이유로 퀴어 문제같이 민감한 문제들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면 억측일까?
들떠있던 가슴이 잦아들며 영화가 버겁기 시작했을 때 불현듯 메릴 스트립이 메릴 스트립하는 장면이 나왔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완벽한 비호감 여배우였던 디디 엘런, 즉, 메릴 스트립이 시골 고등학교 교장인 톰 호킨스에게 자신이 스몰 타운 걸, 즉 촌뜨기 출신 소녀였다는 단 한 마디 대사를 읊조리는데! 맙소사!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2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배우의 눈빛이 바뀌며 관객들을 순식간에 감정 이입하게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장면의 메릴 스트립의 화면 장악력이란 정말로 마법 ; 매직이라는 단어 말고는 표현하기가 힘들 것이다. 코러스 역할을 맡은 니콜 키드먼도 주인공 에마와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에서 마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매혹을 뿜어내는 것을 보면 역시는 역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녀들의 얼굴이 그녀들의 젊은 시절만큼 광채가 나고 윤기가 좔좔 흐르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의 연기력은 그녀들이 배우로 지낸 시간과 정비례하는 것 같아 차라리 감동적이었다.
어떠한 좋은 영상 작품이라도 결점을 가지듯 값비싼 할리우드판 공익광고라는 혹평까지 받은 <더 프롬>도 장점이 있고 나름의 추억을 간직한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차별받는 대상인 흑인인 그린 부인이 또 다른 차별의 대상인 동성애를 차별한다든지 퇴물로 차별받는 배우들이 인디애나 주민들을 눈 아래로 보고 차별한다든지 하는 부분들은 의도된 블랙 코미디였다면 대단히 실례겠지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속 빈 강정이라는 평도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더 프롬> 오디션에 현역 뮤지컬 배우들이 다수 도전했다가 결국 할리우드 스타들로만 호화 캐스팅을 꾸려져 결국 뮤지컬계의 비판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이성애자인 제임스 코든이 동성애자 배리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2020년 최악의 연기라고 평가절하 받았다는 이야기는 결국 너나 나나 쿨해 보이고 싶어 하지만 진짜로 쿨하기는 어렵다는 '현실과 진실'을 반증하는 후일담일 듯싶다. 연말연시에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뮤지컬 영화를 보고 싶었으나 세상 교화적인 내용 전개 때문에 실망했다가는 다시 같이 늙어가는 배우들의 근황에 만족한 사람들 중의 일인으로, 나는 즐겁게 보았으나 주변 여러분에게 강추는 어렵겠다는 결론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극 중에서 스팸 먹는 사람들을 폄하했기 때문에 삐져서 독설을 늘어놓은 것은 절대 절대 절대 아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