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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Dec 30. 2021

1. 캠퍼스를 다시 밟다

혼란의 시작

캠퍼스를 다시 찾았다.

24년만이었다.


끝맺지 못한 아쉬움과 패라는 쓴 경험이 되살아났지만,무겁진 않았다.


자의로 이 곳을 찾을 일은 전혀 없었다.

'평생을 외면할  없겠지' 싶었지만, 너무  갑작스레  기억 소환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엄마 역할, 아이의 일이었다.


"OO야~ 엄마... 옛날에 이 학교 다녔었어..."

"진짜?진짜야? 와...그럼 여기 친구들도 있어?"

"글쎄..옛날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을거야 아마..."

"엄마, 여기서 뭐 했어?"

"뭐 했냐고? 음....놀았지....놀고, 밥 먹고, 술 먹고...."

"와~ 좋았겠다 엄마~ 여기 엄청 커~~~엄마, 학교 커서 좋았겠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찾은 그 곳에서, 흑역사는 적당한 포장지로 덮어두었다.

굳이 아이 앞에서 이해하지도 못할 말들을 어지럽게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두어 시간, 낙엽이 흩날리는 예술대학 건물의 정자에 앉아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 저들 중 누군가도, 20여년 전 나와 같은 외로움 속에 이방인처럼 이 곳을 서성이사람은 없을까...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2021년 겨울이 찾아온 12월의 쓸쓸한 아침은, 내가 이 곳을 처음 찾았던 1997년 2월의 차가운 봄과도 그렇게 닮아있었다.




"엄마....나 원서 어디로 써요?"

"원서? 선생님 뭐라시는데?"

"뭐 그냥....국립대 쓰면 좋다셨지...근데, 나보고 알아서 결정하래.."

"넌 어디 갈건데?"

"나? ........ 나는 저기....인하공전 가고 싶은데..."

"인하공전?"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공중전화기 너머 엄마의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안되고! 거긴 안되고. 일단 OO대 써라."

"OO대? 근데, 거기 가면...나 중문과도 못가 어차피..."

(외고 재학시절 전공이 중국어였기에, 당연히 엄마는 '중문과'를 기대할 줄 알았다)

"과가 뭐가 중요해, 일단 들어가서 하고 싶은 과로 바꾸면 되잖아"

"알겠어요...그렇게 하지 뭐...."


언제나 엄마의 희망이 되고 싶던 19살 나는, 그 나이가 되도록 내 생각이라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모범생으로 통했고, SKY 대학을 갈만한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한을 풀어야하는 막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냥 그런 내가, 나인 줄 알았고, 나여야 했다.

말 잘 듣고, 착하고, 열심히 하는 그런 내가 전부여야 했다.




1997년. 엄마의 바램대로 부산의 OO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던 내 꿈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학교와 엄마.

그들에게 내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지 못했던 나는, 마네킹처럼 영혼없이 그 곳에 그냥 서 있었다.


하루 4시간을 자고, 자정을 넘어까지 화장실 가는 몇 분아까워하며 보낸 시간들.

일탈이라 해봐야,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나와 떡볶이를 사 먹고 들어갔던 게 전부였고,

꿈이 무엇인지 생각할 여유도 없이 기계처럼 외우고 또 외웠던 글자들 속에 파묻혔던 내 소녀시절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찬란한 무지개 빛 인생이 날 기다릴 줄 알았건만,

신입생 환영회부터 시작된 술과 담배로 찌든 선배들의 모습..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전공과 교수님들의 낯선 눈빛...

광할하지만 내가 설 곳은 1평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캠퍼스...

나는 그저 이방인이었다.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가...'

쓰나미보다 더 큰 후회와 허무함이 날 덮쳐왔다.


결국, 입학 후 3개월쯤부터 결석이 시작되었고, 1학년의 두 학기를 '제적'이라는 이름으로 갖다 버렸다.

목표를 잃은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지겨웠고, 책을 보는 것은 토할 것만 같았다.

더 공부해봐야 세상 어디에도 내가 꿈꾸던 미래는 없을 게 분명했다.


몇 개월간 집에만 쳐박혀 지냈다.

하루 종일 갇혀 있는 나를 보는 가족들의 힘듦이 느껴졌지만, 내가 겪는 고통이 모두 엄마때문인 것 같아, 묘한 당당함마저  있었다. 보란 듯이 모두를 더 괴롭게 하고 싶었다.

(나중에 알았다. 고통의 순간에, '원망'보다 쉬운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원망을 해야 고통의 강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을...)


1998년, 2학년으로 올라가는 동기생들의 소식을 들으며 우울함은 극에 달했다.

하루가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그들과 달리, 난 여전히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후회로 눈물 짓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일상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게 세상과 담을 쌓은 나는, 새학년 새학기...결국 캠퍼스 대신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게 되었다.


내 인생 첫 좌절, 그 쓴잔을 마시며 현실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나,

취업의 문 앞에서, 사랑의 배신 앞에서, 결혼의 현실 앞에서, 육아의 혼란 속에서..

내가 스무 살에 겪었던 그것이 '참 달콤한 잔'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때가, 어른이 되기위해서는 언젠가 겪어야할 성장의 고통이었음을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치 송아지가 태어나서 첫 걸음을 떼기위해 비틀거리고 애쓰는 그 모습처럼 말이다.


우울증으로 세상과 잠시 단절되었던 그 때, 문득 차가운 밤거리를 혼자 걷다 군고구마 파는 아주머니를 본 일이 있었다.큰 드럼통 안에 붉은 장작들을 가득 채워 따뜻한 군고구마를 팔던 그 곁에,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군고구마를 팔던 그 아주머니는 앳된 얼굴의 젊은 엄마였다.

출처 :  보험을 페이로 받는 사람들 - 달빛밟기 님 사진


'나도 애가 있으면, 용감해질까?'

아이의 손을 잡은 젊은 엄마의 얼굴과 몸짓에서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칼바람 속 추위 따위는 아랑곳 없이, 밤을 지새워도 견뎌낼 것 같은 강인함이 느껴졌다.


갈 길을 잃은 허무함에 두려움과 외로움이 범벅된 마음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찾고 싶다는 몸부림이었다.

아이를 위해 살아갈 이유를 찾았을 엄마처럼, 내게도 그런 소망이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20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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