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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Dec 30. 2021

2. 20대의 사춘기 '착한 아이'가 지겨워요

엄마와의 분리

모두가 푸릇푸릇한 청춘의 봄날을 누리는 3월이 싫었다.

20살의 3월도, 21살의 3월도 내게는 온통 회색빛이었다.


대학 1학년을 제적이라는 빨간 딱지로 장식하고,

학교 대신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은 나는 너무 연약했다.

몸이 연약했으면 차라리 청순미라도 있었을까?

우울증으로 몸은 20키로 이상이 불었고, 마음은 씻기를 포기한 막대걸레처럼 너덜거렸다.


신경정신과 의사와 첫 면담을 하던 날, 선생님은 엄마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셨다.

'낯선 중년의 남자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불편했던 첫인상이었지만,

엄마가 없는 그 곳에서 왠지 편안함이 느껴졌다.


"요즘 어떤가요?"


이 질문 한 마디에, 나는 30분을 울었다.

왜 우는지 묻지도 않았고, 다음 환자가 있으니 이제 그만 울라는 말도 하지 않으셨다.

눈물이 그칠 무렵, 선생님은 책 한 권을 추천하셨다.


<우울한 현대인을 위한 번즈 박사의 충고> 라는 긴 제목의 책이었다.

"아직 젊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이거 읽으면서 매일 시키는대로 적어보세요"


노트를 반으로 접어, 한 쪽에는 매일 머리 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들, 반대쪽에는 그 생각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적어보라는 식이었다.


'난 화가 난다.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다.'

--> '화가 났구나~ 마음이 답답하구나~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 이해해. 나가서 산책을 한번 해보면 어때?'


이게 무슨 유치한 짓인가 싶었지만, 석 달의 상담을 거치면서 차츰 나는 회복되어갔다.

상담 마지막 날, 선생님은 내 귀걸이의 색깔이 화려하다며, 나를 꾸미고 싶은 그 마음을 칭찬해주셨다.

이제는 더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다며, 혹시라도 힘들면 다시 오라는 이야기가 마지막 상담이 되었다.




상담의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할 수 없던 무기력증이 차츰 나와 멀어지고 있었다.


부산에서 유명한 서면거리를, 스무살이 되도록 나는 10번도 나와보지 않았다.

버스로 30분이면 나올 거리였지만, 낮보다 밤이 화려한 이 동네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용기였던지, 상담이 끝난 후 서면 한 복판에 자리한 패스트푸드점에 일자리를 구했다.

엄마는 여전히 학교로 돌아가길 바라셨지만,겨우 일으킨 내 마음이 또 무너질까 여전히 두려웠다.


지금껏 학교와 집 밖에 몰랐던 내가 싫었고, 내가 속하지 않던 세상으로 나를 밀어넣고 싶었다.

엄마의 반대는 강했지만, 예전처럼 "네 그럴께요"라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 한번도 묻지 않았고 돌보지 않았던 '나'를 돌보고 싶어진 것이다.


'착한 아이'라는 페르조나를 벗고, 나를 휘감고 있던 두꺼운 붕대들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

기껏해봐야 햄버거 가게 일을 시작했을 뿐인데, 도끼로 큰 바위를 쪼갠마냥 엄청난 에너지와 희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싫어요"라는 말을 뱉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좋은 분이었다.

자식을 위해 많은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강인한 성품과 생활력을 가진 분이셨다.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외도로 9남매를 힘들게 키우신 외할머니 밑에서 장녀로 자라며, 일찍 경제적 독립을 했고, 동생들을 위해서도 헌신하셨다.


14살부터 주경야독으로 겨우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숨쉴 틈도 없이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하셨다. 

가난이 싫어 결혼한 남자는 더 가난한 집 아들에, 가정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곤 없는 남편이었다.

결국 무책임한 남편을 탓할 겨를도 없이, 27살부터 다시 쌀가게를 시작으로 식당, 탁아소(요즘의 어린이집 같은 곳) 등 끊이지 않고 힘든 일들을 하셨다.


공부가 부족했던 탓이라고만 생각한 엄마는, 맏딸인 내가 그런 고생을 하지 않길 바라셨고,

엄마 인생을 물려받지 않을 방법은 오직 좋은 대학, 멋진 직업이라고만 생각하셨다.


그 엄마의 '한'을 이해하고, 위로하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스무살 나의 좌절을 바라본 엄마는, 엄마의 인생도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얘기하셨다.

내가 어떤지, 무엇때문에 힘든건지 묻지 못했던 것은, 엄마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었던 이유는 엄마의 사랑이 유난히 컸기 때문이었고, 사랑이 컸던만큼 나와 엄마가 분리되기까지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결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수없이 선택의 순간에 놓인다.

첫째 아들에게는 유난히 많은 질문을 하며 키웠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니가 생각을 얘기해줘~"

13살인 지금도 납득이 안되면 행동하지 않는 아들을 대할 때마다, 가끔 '그냥 시키는대로 좀 하면 안되니?'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도 완전한 사랑을 줄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나의 거리두기 양육 방식(때로는 지나친 간섭으로 오작동 발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엄마와 겪었던 그 분리의 아픔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신념은 어떤 부작용도 감수할 만큼 단단하다.


지금 엄마와의 관계가 회복되기까지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나를 인정하며 지지하는 엄마를 볼 때마다, 부모도 자녀를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됨을 느끼게 된다. 나 또한 아이들을 통해 평생을 다듬어가게 되겠지.....


의식의 진화는 이렇게 모든 경험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모든 경험은 내게 반드시 유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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