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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Jan 07. 2022

신이 내게 준 위안

"OO아~ 넌 이 학교에 오는 것, 네가 결정한거야?"

"네!"

"그럼 만약 엄마가 안된다고 하시면 어떡할래?"

"아빠한테 얘기해야죠!"

"아~ 그럼 아빠도 안된다고 하시면 어떡할래?"

"음....그럼 저.....기도해야죠!"

목사님은 첫째 아들과 면접을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우리 부부를 부르셨다.


"요런 아들을 어떻게 키우셨어요~ 제가 다 감동받았습니다.

이제 두 분만 잘 하시면 됩니다. 아이는 무조건 합격입니다."


첫째 아들의 중학교 입학을 위한 면접에서 예상치 못한 아들의 답변을 듣고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두 분을 다시 설득해봐야죠" 정도의 답을 상상했는데, 목사님 앞에서 너무나 정답같은 답을 말한 것이다.


철이 없는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장난이 심한건지...

온갖 추측을 난무하게 만들었던 초등 6년의 생활이었다.

이 녀석의 담임 선생님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할 수 없는 엄마였고,

매 순간 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이 먼저였고,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보내게 해주세요'

'좋은 선생님, 친구들과 만나게 도와주세요'

'마음을 다스려, 부딪히지 않도록 지혜주세요'


첫째의 '그럼, 기도해야지요' 라는 대답은 그 6년의 눈물을 한 순간에 씻어주는 한마디였다.




종교가 없던 집에서 자랐지만, 친정 엄마의 유전자로 항상 무언가를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그것은 절대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꾸미고, 먹고, 쓰는 것에 전혀 관심없는 청춘의 시간을 보냈지만,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는 항상 궁금했고, 대체로 냉소적인 허무주의자였다.


제사를 지내는 집안이었기에, 교회는 최후의 도피처였다.

몇 군데를 돌고 돌아, 이모의 손에 끌려 교회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반겨주었고, 어떻게든 날 교회에 잡아두려고 친절을 베푼다고 느낄 뿐이었다.

일요일이 되면 나를 태우러(혹은 잡으러) 우리 집까지 달려왔고, 점심까지 먹여가며 날 보내주지 않았다.

결혼 전이었고, 어차피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그 곳에서 재밌지도 않은 일들에 깔깔 웃는 사람들이 안쓰러워보이면서도, 나 또한 아무 생각없이 그들처럼 웃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큰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아이와 남편 핑계로, 교회에 들르기만 할 뿐, 1시간을 채우지도 않고 발도장만 찍은채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첫 아이가 4살 무렵이 되자, 올 것이 온 것마냥 갑작스레 모든 것들이 폭발했다.

결혼과 육아, 경제적 문제, 고부 갈등 등...

풀썩 쓰러져버렸고, 그 누구도 날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남편도, 엄마도, 자식도 전혀 내 편은 없었다.


다시 이모의 손에 끌려, 새벽기도라는 것을 시작했다.

어제와 달라진 것 없던 오늘이었는데, 이상하게 새벽기도의 첫날부터 모든게 달라보였다.

예배당에 앉아 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지어 한 두살 밖에 안된 아기들을 안고 새벽 예배를 나와서, 무슨 인생의 곡절이 있는지 엉엉 울고 있던 예쁘고 어린 엄마를 보며, 뭔지 모를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 40일을 채우고, 나에겐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용기'라는 놈이 생긴 것이다.

현재의 문제만 언제나 보이던 부정적인 나였는데,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모르겠다. 기도하면 들어준다며!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기도라도 해보자!'

이 무식하고 단순한 생각이, 이상하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남편도, 시댁도, 경제적 문제도, 아이들도 변한 것은 없었지만, 나는 매일 즐거웠다. 미친 것 같았다.




그렇게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무엇이 변했을까?

내가 신을 믿으며 달라진 것이 무엇이고, 내게 어떤 유익이 있었을까?


많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내가 신을 믿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되었을지 모른다고 말할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두 가지 인생을 비교할 수 없기에,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믿는 구석이 생겼다는 것이다.


첫째 아들의 학교 면접 과정에서 '기도해야죠'라는 말은, 신을 믿는 내게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게 해주실 거라 믿어요'

'그렇게 해주시라고 졸라볼래요'

'하지만, 그렇게 안해주시더라도 날 위해서인 것을 알아요'

'모든 상황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알아요'


부정적이고, 이성적이며, 두려움 많던 내게서 이런 아이로 성장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아이를 양육할 때, 언제나 듣는 교훈이 '내 틀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이만큼이고, 본 것이 이만큼인데, 어떻게 그 이상의 그릇에 담기가 쉽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준을 뛰어넘어야 아이의 특별함과 다름을 인정하고 볼 수 있다.


'엄마가 안되면, 아빠가 안되면, 기도하겠다'

결국,  '나에게는 부모님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믿는 구석이 있답니다'

는 말로 내게는 들렸다. 그래서 눈물이 흘렀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유한한 나를 의지하지 않고, 더 큰 분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할까...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철이 없다고만 생각했던, 우리 아들이 어느새 자기만의 믿음을 갖고 자라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큰 보물이었다.


오늘, 신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위안은?

아들과 나의 성장. 이것으로 대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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