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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Jan 14. 2022

착한 사람에 대한 횡포

감정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인가

몇달 전 직장을 그만 둔 친구가 있다.

친구는 결혼 전, 간호사로 10년 넘는 경력을 자랑하던 씩씩한 여성이었다.

어지간한 상황들은 겪을만큼 겪은 강단있는 여성이었다. '간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헌신과 희생의 정신이 남달랐고, 긍휼과 측은지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늦은 나이에 힘든 결정과 용기를 내어 시작한 곳에서, 1년을 겨우 버티고 눈물로 퇴사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럴 줄 알았어'

'그게 뭐 그렇게 힘든단 거야!'

'이 정도는 감수해야는 거 아냐'

블라블라....


친구에게 제발 자기 속으로 숨지만 말아달라고, 퇴사 전 6개월간 고민상담을 하며 같이 울고 웃었다.

친구의 퇴사 이유는 하나였다.

처음엔 '어떤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은 '감정폭력'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폭력이었다.


친구는 착한 사람이다.

중년의 아줌마에게 '착하다'는 말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음밭이 선한 사람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피해주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남이 싫다는 일 묵묵히 하는 사람이다.

그런 '미련함'때문에 답답해보일 때도 있지만, 그래야 그 친구는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이런 성품을 악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례한 행동이나 말투, 과도한 요구까지도 그 친구가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를 서서히 정당화시켜가는 사람들이었다.

영화 '파리대왕'의 아이들 모습처럼, 인간의 사악함은 갈수록 악랄해지고 집단화되어 한 사람을 정서적으로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은 너무 화가나서, 그 친구에게 '복수의 요령'을 설명한 날이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그 사람이 지나가잖아? 그럼 가까이 다가가 인사하는 척 하면서, 귀에다 대고 쌍욕을 박아!    'ㅆㅂ 입 다물고 살아!'   이렇게! 할 수 있겠어?"

친구는 깔깔 웃더니, 도저히 못하겠다고 내게 녹음을 부탁해얄 것 같다고 넘겨버렸다.

공감능력이 무한대인 나로써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대신 욕을 해주고 싶은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친구는 결국 퇴사와 동시에, 세상과의 소통을 멈추었고, 서너 달동안 은둔에 들어갔다.






며칠 전, 반가운 친구의 이름이 휴대폰에 떴다.

"야~~~뭐야 도대체, 전화도 그렇게 안받더니..."

"....미안 미안...ㅎㅎㅎ 그냥 내 소식을 아무에게도 알리기가 싫었어"

"어때, 괜찮아?"

"음....글쎄....그럭저럭...."


친구는 그 사이 종양제거 수술을 2번 받고, 신경정신과 상담을 서너 차례 진행중이라고 했다.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서, 의사의 권유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는 중이라고 했다.

사람들과 말이 하기 싫었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듣기가 싫었다고 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 중 한 명이 불현듯 집 앞에 찾아와 사과를 한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친구는 그의 일방적인 사과 앞에 더 울분이 터져 며칠을 앓아누웠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을 지켜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통화를 끝내고도 한 동안, 그 쓸쓸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었고, 설령 좋은 단어가 떠올랐다해도 그것이 그 친구에겐 전달되지 못할 의미일 수도 있었다.

'힘내고, 곧 보자'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쉬고 싶은만큼 쉬어! 차 마시고 싶을 때 연락해 꼭!" 이라는 말을 대신할 수 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아파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그 친구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물리적 환경때문에, 마치 나도 가해자가 된 것마냥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왜 세상은 '착한 사람'을 함부로 대할까?


이 화두가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내가 양보하면 손해본다는 세상, 내가 순진하면 이용당한다는 세상, 내 것을 내어주면 호구 취급 당한다는 세상....이것이 정말 내가 속한 세상인지...

나도 가진 것이 없어서, 이렇게 피해자의 입장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건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들이 꼬여갔다.




베르너 르텐스의 [감정폭력]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신적 폭력은 이중으로 과소평가 받는다. 첫 번째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깍아내리거나 무시하는 행동이 분명한 감정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회에 만연하다는 이유로 별 일 아닌 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로 감정적 폭력을 통한 상처는 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피해가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결과, 피해자들은 정신적 폭력으로 받은 괴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라고 강요받는다.

친구의 상황과 흡사했다.

'직장에서 그 정도의 상황을 못견디면 관둬야지, 어른이 돼서 알아서 해야지...' 같은 말들로 친구를 윽박지르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내게도 들리는 것 같았다.


감정폭력은 우리 주변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 연인과 부부, 회사, 군대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큰 문제의식없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가해자들을 독기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던 눈길을 내 자신에게도 돌려봤다.

무엇이 다를 바가 있을까..

그들도 '나쁜 사람'이지만, 나 역시도 누군가엔 그런 사람이었다.

특별히 가정 안에서 나의 모든 가면을 벗으면, 얼마나 독재적 권력을 행사했던지....

감정폭력 앞에선 가해자나 피해자가 특정될 순 없을 것 같았다. 모두가 가해자고 피해자일 수 있는 일들이었다.



'착한 사람'에 대한 횡포...

특정 범죄 집단이나 사회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 가운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감정폭력'의 다양한 모습이, 나보다 착한(혹은 연약한) 사람을 끝없이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본다.


많은 곳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한 정보들이 난무한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소박하게 바래보기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따뜻한 세상'을 먼저 이야기하는 세상에 살고 싶다.


나부터, 내 가정부터 서로를 지켜주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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