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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Oct 18. 2021

딸기10알,귤2개,사과4조각

나는 과일을 좋아한다. 그것도 무지하게 좋아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것에 적응했고, 과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냉장고 속에 과일이 썪기 전에 먹자며 남편까지 나눠줬다.

아이가 둘일 때는, 사놓기가 무섭게 과일 칸이 비어갔지만, 남편이나 나 둘 중에 한 사람은 한 두조각 챙겨먹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셋째...막내가 태어나고, 이제는 우리 부부에게 돌아올 과일은 전혀 없었다.


가계의 형편이 분명 첫 아이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물가는 더 빠른 속도로 치솟았고, 계절을 무시하는 형형색색의 비싼 과일들이 넘쳐나면서, 더 이상 다섯 식구의 입에 들어갈만큼 풍족하게 채워둘 수는 없었다.     

결국 셋째가 16개월쯤 될 무렵, 우리 집엔 규칙을 만들었다.

딸기는 10알씩만, 귤은 2개씩만, 사과는 4조각씩만.

때에 따라 다른 과일들이 올지라도 그 사이즈들에 맞춰 비슷한 기준을 적용시켰다.

복숭아는 사과와 비슷하므로 4조각, 포도는 딸기와 비슷하지만 알 개수가 풍성하므로 20알, 키위는 귤과 비슷하지만 더 비싸기에 1알씩만...등등

복잡하지만 생활 속에서 배워갔기에 아이들은 알아서 자신의 먹을 양을 예상하고 더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차가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였다.

갑작스레 4살 딸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사귄 친구와 놀고싶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또래가 맞았지만, 나는 엄마들보다 10살은 많은 언니기도 했고, 아기새처럼 저녁밥을 기다리는 녀석들을 두고, 한가롭게 앉아있기도 영 신경이 쓰였다.

며칠을 보채기에, 어쩔 수 없이 엄마끼리 통화를 하고 날을 잡았다.

무언가를 들고 가얄 것 같아, 과일 가게 앞을 서성이는데 갓 나온 새초롬한 딸기들이 눈에 띄었다.

특상품이라곤 하지만, 한 소쿠리에 3만원이라니...

아이들에게 제철 저렴한 과일을 사주면, 3종류나 살 수 있는 것을..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언니의 체면상 너무 저렴한 것을 선택할 수도 없었기에 한 소쿠리 들고 친구 집을 찾았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가씨같이 예쁜 엄마와 똑닮은 딸 아이.

공주님처럼 핑크빛으로 꾸민 예쁜 방과 장난감들, 삼남매의 전쟁터같은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품격마저 느껴졌다. 영국 왕실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찻잔에 커피를 마시며, 자연스레 아이들 이야기가 시작됐다.

“언니,우리 애한테 고은이 얘기 많이 들었어요.오빠들이랑 놀아서 그런지 성격이 너무 좋은 것 같더라구요”

“그랬구나~ 전 그냥 막내라, 뭔 짓을 해도 이뻐 보여요. 내 눈에만 그리 보인다 싶었는데,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네요~”

두런 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중, 친구의 엄마가 물었다.    

 

“근데, 고은이네는 과일 먹는 개수가 정해져 있어요?”

“.......”

부끄러울 일도 아닌데, 냉큼 그렇다고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고은이가 우리 딸한테 자기 집은 과일을 정한 개수만큼 먹을 수 있다고, 너는 딸기 몇 개 먹어? 물어봤대요~”

“아....네.....우리는 입이 많다보니....같이 나눠 먹자고..”     

대충 웃으며 이 주제를 벗어나려는데, 친구 엄마는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이제 겨우 4살인데, 그만 먹자고 하면 그만 먹나요?”

그러게...단 한 번도 더 달라고 우는 것을 보지 못해서 당연히 배가 찼겠거니 생각했다.

큰 오빠들이야 이리저리 눈을 피해가며, 명절이나 생일 받은 용돈들로 다른 간식거리들도 사먹겠지만, 막내는 한 번도 내가 준 것 이상을 내놓으라고 울지 않았었다.

“배가 작나봐요~”

애써 웃으며, 아이들을 보러 간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친구 엄마는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잡았지만, 집에는 나를 기다리는 입이 둘이나 더 있으니, 남의 집 밥상에 내 숟가락만 얹기는 불편했다.


안 가려는 막내 딸을 잡고 친구집 현관문을 나서는데, 친구 엄마가 양손 가득 까만 봉투를 내밀었다.

“엊그제 할머니가 오시면서 과일 많이 사오셨어요. 이거 좀 나눠 가세요~”

그냥 보기에도 묵직한 두 봉투를 받아드니, 내가 들고간 딸기 한 소쿠리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우...괜찮은데, 이걸...내가 다 받아가도 돼요?”

“정말 괜찮아요~저희 집은 매일 남아서 버려요. 같이 나눠 먹어요.”     


두 손 가득 과일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 배고픈 어린 양들은 득달같이 달려나왔다.

“어디 갔었어~ 빨리 오래도 안오고 진짜!”

7시가 다 될 무렵이었으니, 배가 고플만도 했다.     

“이거 봐라, 고은이 친구 엄마가 주셨어”

봉투를 받아 열던 아들이 탄성을 지른다.

“와~~~엄마, 봤어? 이거 봐바!”

봉투 안에는 큼지막한 딸기 한 소쿠리, 귤 한봉지, 사과 10알 정도가 들어있었다.


아이들은 안그래도 배 고픈데, 밥보다 과일 먼저 먹자고 아우성이었다.

“일단 앉아봐, 그럼 과일부터 깎아줄게.”

저녁 준비할 시간동안 먹고 있으라고, 황급히 과일을 자르고 담았다.     

좀 전에 들은 친구 엄마의 얘기도 있고, 오늘은 공짜로 얻게 된 과일이니 마음껏 먹어라 싶은 마음에, 개수 생각도 없이 큰 접시에 담아 주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 만드는 동안 아이들은 오랜만에 과일로 포식하는 듯 했다.

“얘들아, 밥 먹어~”

그새 땀 범벅으로 술래잡기에 한창이던 아이들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아까 과일 다 먹었어? 어서 밥도 많이 먹어”

“네~ 다 먹었어요~”

평소 엄마의 오른손을 자처하는 둘째 아들이 발딱 일어나서 과일 접시를 챙겨왔다.     

그런데 이게 웬걸...

다 먹었다는 과일 접시엔 과일이 꽤 남아있었다.

“왜 남겼니?”

“응?? 우리? 다 먹었어. 딸기10알,귤2개,사과4조각씩. 그건 내일 먹어야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미안함은 아니다. 내가 안사먹인 것도 아니니 미안할 필요는 없었다.

기특함도 아니다. 엄마 말 어지간히도 안들으면서, 이럴 때만 뼈에 박힌 습관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기특하게만도 느껴지진 않았다.     


어쩌면....고마움인지는 모르겠다.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규칙에 따라와주고, 엄마의 입장마저도 헤아려준 느낌.

아무 생각없는 본능적인 행동이었어도 무관했다.

그냥 눈물이 핑 돌았고..... 같이 살아줘서 고마웠다.


이러니, 내 입에 과일이 들어오지 않아도 참을만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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