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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잘안 Oct 18. 2021

올리브나무의 열매를 맺기까지

매일의 반복

 5,4,3,2,1 땡!


"엄마~~~~"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그들이 내게로 쳐들어온다.


첫째 빵빵이


초등 6학년인 그는 한 손에 시험지를 들고 왔다.

관용구 시험을 쳤는데, 150문제중 48문제를 틀렸다며

담임 선생님을 탓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이해도 못하겠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삼천포로 빠지다.


등등등....

이런 국어 관용구 시험 문제가 어렵단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13년간 토종 한국 부모 밑에서 살았는데....

매일 쓰는 말들이 시험에 나오자,

아무 생각이 안났다는 당당함.


13살 남자 아이에게는 매일 귓구멍에 박히는

일상 대화도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구나...


납득이 어렵지만,

납득해야 했다.



둘째 빵빵이


미술학원에서 돌아와 이상한 생각이 자꾸 든다고 말을 건다.

요즘 성에 관심이 생기면서,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 같다.


"성교육 동영상을 4학년이 되면 볼텐데,

나 사실.....아기 어떻게 태어나는지 알아....."

"엄마, 자꾸 상상이 돼...."

"으....."


혼잣말인지 대화 시도인지,

계속 내게 농도 짙은 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차마 글로 다 써놓을 수 없는 수위...ㅠㅠ)


상상력이 풍부한 둘째는 한번 시동이 걸리면

좀처럼 멈추기가 어렵다.


숨기거나 감추는 것보다,

들어주고 설명해주며 맞춤식 교육을 해주려 노력하지만...


국어 관용구를 이해 못하겠다고 우는 13살 형 옆에서...


끝도 없이 진지한 성교육을 하려니

슬슬 울화가 치민다.



셋째 빵빵이


오빠들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려둔 밥상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여전히 밥알을 세며, 위태롭게 물컵을 만지고 있다.


평소 날 가장 사람답게 느끼게 해주는 나의 꽃같은 딸이지만,

밥상 앞에선 언제나 분노유발자다.


"공주야~ 언능 먹어라~ 주방 퇴근하련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팔꿈치에 걸린 물컵이 '탁'하고 쏟아진다.


"엄.............마..............,나..실수.....한거야?"


순간 내 몸의 모든 구멍에서 용암이 끌어넘쳐 흘러내림을 느낀다.


물어보면 뭐하니...

이미 엎어졌단다.....


상판 유리 밑으로, 의자 커버들 안으로,

식탁 바닥 아래로....

흥건히 물이 넘쳐 흘렀다.


왜 그렇게 큰 컵에 물을 담아온거냐고....



첫째는 국어 관용구 시험으로,

둘째는 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셋째는 엎질러진 물 수습으로....


동시에 모든 사건은 발생했다.


나는,

바닥을 기어 물을 닦으면서,

국어 관용구 설명과 동시에,

성교육 질문에도 끝없이 대답한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다 조용히 해~~~~~!"


"지금부터 말 걸지마!"


동굴에 나만 남겨진 듯 적막함이 흘렀다.


십여분 지났을까?

나의 눈치를 살피는 세 아이가 보였다.


여전히 시험지를 들고, 정답을 찾아 헤매는 첫째.

WHY책을 들고 질문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둘째.

닦다 만 걸레를 발로 문지르고 있는 셋째.


헛웃음이 났다.


아이들에게 짜증낼 것이 무엇이고,

화를 낸들, 아이들 또한 화나게 할 것이 아닌가...


끓어오르는 화를 삼키고 입술을 깨문채,

대충 마무리 하는 걸로 밤을 맞이했다.






다음 날 새벽,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어젯밤 화를 발산하지 못하고 잠든 탓에 몸은 돌덩이같이 무거웠지만,

안간힘을 다해 나만의 시간을 쟁취해야했다.


또 다시 시작될 전쟁같은 하루.

전시태세를 갖추기 위해, 적들이 잠든 시간 난 마음의 무기들을 챙겨야 한다.


잠시 명상에 잠긴 순간,

의식과 무의식의 그 중간즈음...

머리 속에 잔잔히 퍼지는 한 말씀이 있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얇아 뗄감으로 쓸 수도 없는 나무기에, 열매가 있어야만 할 일을 다한 것이다.

감람나무는 올리브나무라고도 하는데, 생장이 느려 10~14년이 지나야 열매를 맺고, 30년이 지나야 비로소 수확다운 수확이 된다고 한다. 결실하기까지 긴 시간동안 환경의 공격에서도 버텨야 하기 때문에,제대로 된 열매를 얻는 것은 큰 복과 평화를 상징한다는 의미였다.


옳다구나....


매일의 전쟁같은 하루도, 끝도 없을 것만 같은 피곤함도, 모두 내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과정이구나..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인생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자란다면, 그것이 큰 복이라는 것이구나


머리 속이 딱 하고 깨지는 것 같았다.

13살 아들의 일상적인 관용구 시험의 좌절을 탓할 것도 없었다.

들어도 들어도, 내 삶 속에서 매 순간 찾아오는 시험의 현장에선, 나 또한 아는 지식을 써먹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30년된 올리브나무의 무성한 가지와 잎들을 갖출 때까지, 아프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세워주고 보듬어주고 품어주는 울타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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